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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Jun 04. 2021

44. 완벽한 하루 in 시카고


어제 이번 쿼터 마지막 기말시험을 보았다. 이제  이상 남은 수업은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늦잠을 잤다. 쿨쿨.


일어나 보니 준서, 민서, 와이프가 모두 없었다. 시간은 9:30, 준서 등교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우리 집에 한 대 있는 TV가 주방에 있었다. 익숙하게 리모컨을 들어 온디맨드코리아를 켰다. 그리고 강철부대 3화를 클릭했다.


시작부터 광고가 8개가 나왔다. 괜찮다. 난 어제 시험이 끝났기 때문에 몹시 관대한 상태였다. KAY 광고 중에 남남 커플이 뽀뽀를 했다. 괜찮다. 여긴 미국이고 난 오늘 무척이나 관대하다.


기나긴 광고가 끝나고 강철부대가 시작했다. 그리고 UDT와 해병대 간의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군인들의 멋진 모습 속에서 아침부터 애국심이 불타올랐다. 더불어 나의 스물한 살 기억도 스멀스멀 소환되었다. 연병장에서 공 차던 기억과 함께 혹한기 훈련, 유격 훈련 때의 X고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우들과 뽀글이도 해 먹고 냉동식품도 나눠먹고 했었는데, 그때 참 좋았었지.


흐뭇해하는 순간 민서와 와이프가 도착했다. 오전에 시험 끝난 기념으로 머리를 자르기로 했었다. 백 야드에 상을 차렸다. 이발기와 빗, 숱가위 등을 예쁘게 세팅해 놓고 단정히 보를 두르고 앉았다. 조금 지나자 원장님이 입장하셨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물으셔서, 그냥 짧게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참을 내 머리와 씨름하시던 원장님(AKA 와이프)은 도저히 안 되겠네요(?), 라는 말과 함께 나가버렸다. 그리고 남겨진 나는 거울을 통해 낯설지만 매우 익숙한 사람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디서 많이 본 머리 같은데.. 혹시 김정은 위원장?! 그 순간 나는 고종 32년 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문득 7년 단골인 운중동 헤어바이루이 미용실 원장님이 보고 싶어졌다. 아, 근데 머리 어쩌지..


점심을 먹고 골프 연습장에 갔다. 햇볕이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모자를 썼다.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었다. 평일 낮 연습장은 백인 할아버지들 차지였다. 그 사이에서 젊은 아시아인 한 명이 모자를 쓰고 땅을 파고 있었다. 질긴 양잔디도 김정은 위원장의 아이언 질에 뿌리째 뽑혀나갔다. 내래.


그러다 갑자기 나무티 하나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나에 대한 도전인가, 하면서 근엄하게 티가 날아온 쪽을 바라봤더니, 저쪽에서 한 할아버지가 침침한 눈으로 나무티를 찾고 계셨다. 나는 나무티를 주워서 말없이 다가가 한 손에 쥐어 드렸다. 할아버지는 멀리도 날아갔네 하면서 웃으셨다. 저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김.. 아니 송입니다, 라고 인사하고 싶었지만 모자를 벗어야 할 것 같아 꾹 참고 돌아섰다.


다섯 시부터는 준서 축구 연습이 있었다. 헤드코치인 나는 일찍 가서 연습을 준비해야 했다. 또한 준서 반친구 Quinn을 픽업해 가야 했기에 조금 더 서둘렀다. 퀸은 와이프 절친인 다이애나 딸인데 다이애나가 몇 주 전부터 바빠져서 우리가 퀸을 데리고 다니는 중이었다.


퀸이 카니발에 탑승했다. 타자마자 민서 동요 CD가 흘러나왔다.


쪼로로롱 산새가 노래하는 숲 속에

예쁜 아기 다람쥐가 살고 있었어요

울창한 숲 속 푸른 나무 위에서

아기 다람쥐 또미가 살고 있었어요


퀸의 눈빛이 흔들렸다. BTS노래도 아니고 쌩 한국 동요인 아기 다람쥐 또미라니. 하지만 이 구역의 왕인 민서 최애 곡이라 멈출 수가 없었다. 가는 내내 또미와 함께해야 했고 미국인도 예외 없었다.


축구경기장에 도착했고 퀸과 준서는 태그 놀이를 하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그 사이 나는 미니 골대를 설치하고 콘을 세웠다. 5시가 되자 아이들이 다 모였다.


그리고 Trevor가 왔다. 트레버는 준서 반친구 Glen의 아빠이자 실질적인 이 팀의 코치였다. 코치 신청은 안 했지만 딱 판을 보니 아시아인 아빠 (AKA 나) 혼자 고생하겠구나 싶어 코치를 자청한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물론 내게는 엄청난 은인이었다.


트레버의 지휘 아래 우리는 체계적으로 연습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만 5세, 한국 나이 6-7세의 아이들이 코치 말을 잘 들을 리가 없었다. Rayden은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고 Deni는 세워둔 콘을 다 차내고 있었다. Dominic은 연습 중에 준서, 글렌과 락시저스페이퍼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혼란 속에서도 트레버는 준비한 연습을 모두 완벽하게 진행하였다. 변호사(Lawyer) 짬밥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여러모로 리스펙트다.


한 시간의 연습이 끝나자 아이들은 모두 부모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준서, 퀸, 글렌은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셋은 쪼르르 운동장 옆 놀이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셋이 노는 동안 나는 트레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트레버가 오늘은 갑자기 한국 작가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자기가 5년 주기로 테마를 정해 독서를 하는데 작년은 여성작가였고, 올해는 과학소설이라고 했다. 내가 한강의 vegetarian 을 말해주니 작년에 읽었다면서 매우 좋아했다. 구글로 한국 작가 몇 명을 검색하여 소개해주었더니 노트 앱을 열어 꼼꼼히 영어 철자를 적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야기는 봉준호 감독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고 Parasite와 Snowpiercer, 옥자로까지 이어졌다. 아침에 이어 수미상관으로 애국심이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의 놀이 시간이 끝났고 우리는 퀸을 데리고 다시 차에 탔다. 여전히 차에서는 아기 다람쥐 또미가 흘러나왔다. 퀸 집에 도착하니 다이애나가 문 앞에 나와있었다. 준서와 퀸은 그 집 앞에서 또다시 태그 놀이를 했다. 바이바이 한 후에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오후 7시였지만 여름 해는 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집 앞 잔디를 깎기 시작했고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40분 후 우리는 식탁에 모여 코스트코에서 산 포크 립을 먹었다. 코로나 종식을 기원하며 산 Corona Lite 맥주도 곁들여 마셨다. 준서와 함께 샤워를 하고 난 후 우리 가족은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기말시험이 끝난 다음날, 어쩌면 평범하지만 내게는 완벽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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