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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May 26. 2021

43. 폭풍성장 in 시카고


엊그제 봄이 온 것 같았는데 벌써 여름으로 넘어간 듯하다. 어제 오늘 화씨 90도, 섭씨로는 30도를 넘었다. 앉아 있어도 덥고 서 있으면 더 더운 날의 연속이다. 봄의 ‘생동’함을 넘어 이제는 모든 것이 폭풍 성장하고 있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꽃나무들이 요새 부쩍 더 자란 느낌이다.


요즘 우리 집에서도 폭풍 성장하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민서고 하나는 준서다.


14개월이 갓 지난 민서는 요즘 걷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이 달 초부터 걸음마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하루의 대부분을 걷는 데 사용하고 있다. 얘가 언제 기어 다닌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여기저기 뒤뚱뒤뚱 잘도 걸어 다닌다. 그러면서 기어 다니던 시절에는 감히 진입하지 못한 곳들을 쉼 없이 탐험하고 있다. 잠깐 한눈팔면 이미 어딘가에 들어가 있다. 옷장에도 들어가고 화장실에도 들어간다. 그리고 조용하면 뭔가 일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휴지를 다 뽑던가 쓰레기통을 뒤지던가. 


민서는 걷는 재미에 더해 외출에도 재미를 붙였다. 뭐가 그리 답답한지 눈만 뜨면 밖에 나가자고 한다. 밖이 추우나 더우나 한 손으로 연신 밖을 가리키며 일단 나가자고 한다. 그러다 엄마나 아빠가 좀 미적대는 반응을 보이면 얼른 출입문 근처로 가서 자기 신발을 들고 시위를 한다. “아빠 아빠” 부르면서 신발을 자기 발에 대고 있다. 가히 귀여움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해서 일단 밖에 나가면 다시 들어오려고 하질 않는다. 나가서 잔디 좀 밟다가 민들레 홀씨 뽑아서 돌아다니다가 오빠 그네도 좀 타다가 그러고 다시 잔디 좀 밟다가, 민들레 홀씨 뽑아서 돌아다니다가의 무한 반복이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태어나서 처음 맞는 봄 내음에 기분이 좋아서 그런 듯하다. 싸돌아다니는 거 좋아하는 엄마 아빠 딸 아니랄까봐 꼭 티를 낸다. 


민서에 더해 준서 역시 폭풍 성장 중이다. 특히 요즘은 두 발 자전거 타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지난주 월요일에 처음으로 도전 의사를 피력하며 보조바퀴를 떼어냈고 이후 매일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혼자 타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타는 내내 뒤에서 안장을 붙잡아 줘야만 했는데 균형도 못 잡고 다리에 힘도 부족해서 도무지 혼자 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 덕분인지 며칠이 지나자 살짝 손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단계에까지 가게 되었고, 엊그제는 마침내 내가 완전히 손을 뗀 상태로 온전히 혼자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한편으로는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도 준서 나이에 처음으로 아빠 손을 떠나 혼자 페달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던 때가 있었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스스로 성장하였음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순간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부모의 마음으로 바라보니 여러 생각이 겹치는 듯하다. 아마도 우리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셨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내 두 발 자전거의 기억은 내 손을 떠나 혼자 페달을 밟고 스스로 균형을 잡아 나아가는 준서의 뒷모습으로 바뀔 것 같다. 가슴이 저릿하다.


준서의 성장 중에 또 하나 획기적인 것은 역시 영어다. 표현도 늘었지만 발음이 정말 많이 늘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그것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준서는 격주로 학교에서 영어단어 시험을 본다. 처음에는 my, we, is 같은 단어로 시작해서 요즘은 have, help, make 정도까지 진전되었는데, 시험 보기 전 날에 내가 집에서 모의 단어시험을 봐주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 준서가 자꾸 내 발음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발단은 of 였다. 내가 “오브”로 발음하자 준서가 ov 로 적었다. 순간 잘 모르나 싶어서 내가, “준서야 원오브뎀에서 오브를 적어야지, o and f” 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준서는 나에게, “아빠 그건 ‘오브’가 아니라 ‘오프’에요” 라고 말해주었다. 한국 영어의 산증인인 나로서는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며칠 후 준서와 차를 타고 가는데 나무들이 많아서 내가 “너 혹시 학교에서 ‘우드’ 배웠니” 라고 무심결에 물어보았다. 그러자 준서가, “아빠가 말한 건 ‘ood 우드’ 구요, 나무는 ‘wood 워우드(쓰기도 힘듬)’에요.” 하지만 나도 이번에는 지기 싫었다. 그래서 “아니야 준서야 ‘wood 우드’가 맞아”라고 받아쳤다. 하지만 준서는 영어 앞에서 자비가 없었다. “아빠는 w발음을 안 하고 있잖아요. 따라 해 보세요. ‘wood 워우드’에요.” 팩트로 뼈를 때린다는 말은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이후 나는 준서에게 w발음 코치를 받아가며 ‘wood’를 연습했다. 며칠이 지나자 준서가 “아빠 이젠 조금 비슷해졌어요”라고 칭찬해줬고 또 며칠이 지나자 “이제 괜찮아요” 수준까지 올랐다. 뿌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모의 단어 시험은 아내 몫이 되었다. 그리고 조만간 가정 내 영어말 금지기간에 돌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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