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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May 12. 2021

42. 어느 브로커의 고백 in 시카고


또 다시 그녀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나는 차가운 마음으로 클릭을 했다.


안녕, A

혹시 사람 구해줄 수 있겠니? …(중략)…

고마워,

줄리 보냄


줄리의 메일은 항상 이런 식이다. 언제나 나에게 사람을 구해달라고 한다. 어려운 부탁을 서슴없이 하는 사이지만,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주 메일을 보내 사람을 구해달라고 한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상관없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그녀가 무서워진다.


.


처음 그녀가 나에게 접근한 건 매우 우연한 일이었다. 나는 학교의 어느 한 그룹에 메일링이 되어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통해 나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녀는 은밀히 나에게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그것은 내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아내와 상의도 하지 않은채 덥썩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 일을 꽤 잘 해내었다. 줄리는 놀란 듯했다. 그녀는 일에 대한 나의 적극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소정의 보수를 지급해주었다. 나는 그걸로 우리의 관계가 끝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이미 나는 그녀와 한 배를 탄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나에게 또 다시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역시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또 아내와 상의하지 않은 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다른 사람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혼자 하는 것은 온전히 내 책임이지만, 다른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나는 망설였고 그녀는 재촉했다. 결국 굴복한 건 나였다. 나는 대학원 동기인 한국인을 그녀에게 연결해주었다. 그는 일을 곧잘 해냈고 나는 그녀에게서 고맙다는 답을 받았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다행히 그녀에게서 아무 연락도 없었다. 이제 벗어나는 걸까.


하지만 한 달이 막 지나자마자 다시 한 번 그녀에게서 메일이 왔다. 역시나 나에 대한 매력적인 제안과 함께 또 사람을 구해달라고 했다. 한국인이든 다른 아시아인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나 정도면 된다고 했다. 이번에는 정말 오랫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수에 걸려 결국은 대학원 동기인 일본인을 연결해주었다. 그러나 일본 산업부 공무원이었던 그는 그 일을 거부하였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일이 잘 되지 않자 그녀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했으니 이제 더이상 부탁은 없겠구나 싶었다. 다행인건가.


또 한 달이 지났다.


날씨가 풀리자 그녀는 또 다시 나에 대한 매력적인 제안과 함께 사람을 구해달라고 했다. 이제는 나도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그간의 일에 대해 고백을 했다. 아내는 이따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곤란함을 호소하며 아내에게 한 번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아내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고는 알겠다고, 하지만 걱정된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를 위로했다.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탔다.


.


오늘 오후 4시 30분, 나는 줄리가 부탁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잘 마쳤다. 줄리가 칭찬해줄 것 같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 온 신경은 이미 아내에게로 가 있었다. 오늘 오후 7시, 아내가 처음으로 그 일을 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긴장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계만 볼 뿐이었다.


오후 7시가 되었고, 아내는 서재로 들어갔다. 방 밖에 서있던 나는 긴장되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20분이 지났고 아내는 밖으로 나왔다.


괜찮았어.


아내의 말에 나는 긴장이 풀어져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잘했어. 이제 끝이야. 수고했어.


.


아내가 성공하고 나자 나는 이제 그간의 일을 고백할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이곳에 고백하고자 한다.

그리고 브로커로서의 삶도 이제 그만 끝내려 한다. 안녕.


.


줄리의 메일 전체 내용은 이랬다.


안녕, A

혹시 사람 구해줄 수 있겠니? 딱 너정도 영어를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영어 인터뷰 교육 프로그램에 인터뷰 할 사람이 부족하거든.

20분 영어 인터뷰에 응해주면 25달러 아마존 기프트카드 보내줄게.

고마워,

줄리 보냄

시카고대 영어교육센터


나의 최근 답장 내용은 이랬다.


안녕 줄리,

시카고대학 동기 중에는 이제 더 이상 없을 것 같아.

혹시 시카고대학 안다녀도 상관없니?

내가 한국 여성 한 명을 알고 있거든. 그녀는 딱 나정도 영어를 하거든.

가능할까?

고마워,

A 보냄


.


ps. 사실 미국땅에서 애매하게 영어하는 사람 찾기가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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