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서 종업식 다음날, 우리 가족은 알래스카로 여행을 떠났다.
시카고 O'Hare 공항은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과거 오랜 기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국제공항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오헤어 공항은 여전히 그 명성을 유지하려는 듯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미국 와서 처음 타는 국내선 비행기였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수속을 했다. 빨간 관용여권이 오랜만에 다시 손에 들려 있었다. 수속은 신속했고 짐 검사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터미널에서 기다리면서 햄버거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딩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American Airlines 34열 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출발 예정시간은 오후 5:50.
자리에 앉아 벨트를 채우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장이었다.
"I hate to say..."로 시작하는 그 방송의 내용은 이랬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시카고로 오는 비행기가 연착이 되었는데 그 비행기에서 여기로 옮겨 탈 손님들이 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손님들을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불행하게도 우리 비행기의 출발시간은 예정보다 50분 늦어진 오후 6:40이 될 것 같다. 나도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싫어한다. 이해 좀 해달라."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도 짜증이 났다. 가서 차 렌트도 하고 마트도 가야 하는데 도착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서였다. 손님들의 불평이 늘어나는 순간, 기장의 방송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쁜 소식도 있다."
순간 적막이 흘렀다. 이 와중에 기쁜 소식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한 번 믿어보자며, 수능 영어 듣기 평가하는 것처럼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기쁜 소식은 오늘 우리 비행기가 좀 빨리 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착시간은 아마도 비슷할 것 같다."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나와 아내 역시 웃음이 나왔다. 50분 늦게 출발해도 도착시간이 똑같다니! 순간 나는 한국 코미디 콩트에서 보던 개그, 제가 오늘 비행기를 좀 빨리 몰아보겠습니다, 를 실제로 보는 것 같았다. 그게 말이 되나?
기장의 말처럼 우리 비행기는 몇몇 환승 승객을 기다려 예정된 출발시간보다 50분 지체된 채 출발했다.
6시간 넘는 비행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아내와 민서는 곧 잠이 들었고, 준서는 포켓몬스터 비디오를 시청했다. 나는 철 지난 한국영화를 봤다.
그리고 도착 1시간 전, 창 밖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알래스카로 이어지는 만년설 풍경이었다. 높은 산들이 빼곡하게 뻗어있었고 그 위로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우리는 넋을 잃고 바라봤다. (비행기 진행방향 좌측 탑승 추천)
얼마 후 랜딩 사인이 떴고 우리는 무사히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과연 기장은 약속을 지켰을까?
놀랍게도 비행기는 예정된 도착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오후 9:25 도착. (시차 -3HR)
개그가 아니었다. 곧이어 기장이 당당한 목소리로 방송을 했다.
"말한 대로 예정된 시각에 도착하게 되었다. 알래스카에서 좋은 시간 보내길 바란다."
비행기도 빨리 몰 수 있구나, 를 새로 알게 된 동시에, 그럼 평소에는 왜 천천히 모는데,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되어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 찾고 차 렌트하고 숙소에 오니 오후 11:20이었다. 하지만 창 밖은 아직 대낮처럼 밝았다. 백야라고 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보니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밖은 대낮처럼 밝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우리는 암막커튼을 치고 잠에 들었다.
ps. 비행기 내리기 전 한 시간이 이 여행의 클라이맥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