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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Jul 07. 2021

48. 반딧불이 in 시카고


2018년 7월, 우리 가족은 말레이시아에 있는 휴양도시 코타키나발루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그곳에는 여러 투어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우리는 저녁식사가 포함된 긴코원숭이투어, 선셋 투어, 반딧불 투어가 하나로 합쳐진 나나문 투어를 신청하였다. 반나절 코스로 가격은 성인 1인당 45링깃이었다. 원화로는 12,000원 정도. 매우 저렴하긴 했지만 동남아 투어는 원래 좀 그렇기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다음날 오후 2시, 호텔 앞에서 투어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버스가 아닌 11인승 봉고차가 왔다. 동남아 투어에 어울리는 아주 오래된 봉고차였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고 어린 준서(당시 4살)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맨 뒷자리(4열)에 자리 잡고 앉았다. (뒤)3-3-3-2(앞) 이렇게 앉는 11인승 봉고차였다. 운전자 빼면 총 10명이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봉고차 2열, 3열 접이식 보조의자와 운전자 옆 보조석을 제외하면 총 7자리 정도 빈자리가 나오기에, 우리 가족 세 명 빼면 한 팀 정도 더 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을 비웃듯 봉고차는 항구에 들러 건장한 한국 청년 3명을 태웠고, 샹그릴라 호텔에 들러 4인 가족을 더 태워서 총 정원 11명 탑승을 완성해냈다. 언빌리버블.


그리고 사람들로 꽉 찬 오래된 봉고차는 전 속력으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봉고차는 Fast and furious 의 실사판처럼 과속과 급정거를 반복하였다. 3열 접이식 보조의자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내는 예상치 못한 급정거에 급기야 앞자리 청년의 어깨를 잡기까지 했다. (접이식 보조의자는 작고 헤드레스트가 없다)


꽤 오랜 시간 곡예운전 뒤에 우리는 긴코원숭이 투어 장소에 도착했다. 긴코원숭이 투어는 맹그로브 숲에 사는 야생 긴코원숭이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트를 타고 나가서 코가 긴 신기한 원숭이를 직접 관찰하였다. 한 시간 정도 투어가 끝나고 다시 출발 장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선셋 투어를 위해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니 가이드가 봉고차에 다시 타라고 했다. 우리는 어디 멀리 가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봉고차는 출발 후 딱 1분, 정확히는 길 건너 반대편에 우리를 세워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놀랍게도 해변이 있었다. (나무에 가려져 안보였었다) 우리는 거기서 선셋을 감상할 수 있었다. 굳이 선셋 투어라고 이름 붙이기 본인들도 민망했을 텐데, 암튼 선셋을 보긴 했다.


그리고 다시 봉고차를 타고 1분 이동해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왔다. 돌아오니 저녁식사 시간이었고, 어느새 등장한 동네 아주머니들이 저마다 음식 통을  하나씩 앞에 든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각자 하나씩 말레이시아 음식을 해온 것 같았다.


아주머니들의 무심한 배식 속에 낯선 음식들이 우리의 식판에 담겨졌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음식 남기면 복 나간다고 하셨지만, 이번 기회에 그동안 모아 온 복을 조금 내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음식을 좀 남겼다. 간헐적 단식이 동남아 투어에서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있더라.


저녁식사가 끝나고 잠시 쉬는데 모기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원래 맹그로브 숲에는 모기가 많다. 나는 군대 제대 이후 처음으로 아디다스 모기(가로줄로 삼선이 새겨진 전투모기)를 조우할 수 있었다. 우리 포함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모기퇴치제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준서의 몸 곳곳은 뽀로로 모기퇴치 밴드로 도배가 되었다.


이제 마지막 반딧불 투어만이 남아있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어린 준서에게 반딧불을 보여주기 위해 이 엄청난 투어를 신청하였다. 투어 가이드는 반딧불 엄청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이바구를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또 보트를 탔다. 그리고 출발했는데 뭔가 길이 익숙했다. 그렇다, 처음에 긴코원숭이 보러 나온 곳이었다. 이럴 거면 굳이 투어 이름을 세 개로 나눌 필요가 없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은 어메이징 동남아였다.


암튼 긴코원숭이, 아니 반딧불 사는 곳에 다가가니 정말로 반딧불이가 살고 있었다. 우리는 형광색 불빛을 내는 반딧불이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열댓 마리에 불과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우리는 넋을 잃고 바라봤다. 준서에게 여기 아니면 이런 거 못 보니까 마음껏 보라고도했다.


만원 봉고차를 왕복 3시간이나 타야 했고 또 현지에서 모기와 싸워야만 했던 힘든 투어였지만 그래도 반딧불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후회는 없었다.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카고 우리  근처에 반딧불이가 엄청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앞뒷마당에 매일 수십 마리가 돌아다닌다. 코타키나발루 투어에서 반딧불이 열댓 마리 보려고  힘든 일정  소화했다면, 여기는 그냥 문만 열고 나가도 쉽게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어느 누구도 반딧불이를 보고 "Fireflies!!"하면서 놀라지 않는다. 너무 많아 그냥 파리 같은 존재다. 덕분에 우리가  힘들게 동남아 반딧불 투어를 갔을까 하는 의문이 요즘 들어 점점 하게 들 있다.


만화 슬램덩크, 정대만의 대사처럼 " 나는 그렇게 헛된 시간을 보냈나.." 같은 생각 말이다.


ps. 동영상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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