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서민서패밀리 Dec 15. 2021

55. 가을학기 종료 in 시카고


가을학기가 끝났다. 가을이라는 단어가 무색한 영하의 시카고지만, 어쨌든 나의 마지막 가을학기는 끝났다.


이번 학기는 사실상 내가 원하는 과목을 선택하여 듣는 첫 학기였다. 지난 1년은 코어 과목(전공필수)만 주야장천 듣는 과정이었다. 통계학, 정책분석, 경제학이 그것인데 연구를 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어서 신입생은 무조건 필수로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무사히(?) 마친 나와 같은 2학년들은 그동안 음지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무림의 고수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선택과목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짜잔.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내가 뭐 그리 잘한 것도 아니어서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따라서 가을학기 과목 선택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노벨상 수상 교수, 연구 주제가 나와 잘 맞는 교수,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좋은 교수 등을 추려 엑셀로 정리한 뒤 천천히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며 선택하지는, 물론 않았다. 전혀. 그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더 중요한 기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수업을 이틀에 몰아넣는 일이었다. 내 사정은 이렇다. 집에서 학교까지 자차로 편도 1시간 30분, 왕복 3시간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학교에 하루라도 덜 가는 것이 내 정신과 신체를 온전히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했다. 왕복 3시간이면 경기도 집에서 출발해 내 고향 충청도에 가서 수업 듣고 돌아오다가 망향휴게소에서 순대국밥에 식후 호두과자까지 먹을 수 있는 긴 시간이었다.


결국 나는 화, 목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수업을 엑셀로 추린 후 듣고 싶은 과목을 그 안에서 선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때 나는 우리 대학원의 훌륭함을 목격하게 되었다. 바로 수업시간을 정형화해놓았던 것이었다. 대부분 수업이 화, 목 또는 월, 수로 묶여 있었고, 시간대는 09:30 - 10:50, 11:00 - 12:20, 12:30 - 13:50, 14:00 - 15:20, 15:30 - 16:50 이런 식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겹치는 시간 없이 편하게 수업을 이틀에 몰아놓을 수 있었다. 마, 이게 클라스다.


암튼 그렇게 하여 고른 과목이, Data and Programming II, The Science of Elections and Campaigns, Environmental Science and Policy 였다.


첫 번째 과목은 파이썬(Python) 코딩 배우는 과목인데, Data and Programming 3부작의 두 번째 과정으로 파이썬 코딩을 통해 데이터 분석하는 걸 배우는 과정이었다. 파이썬이 생각보다 배우기가 수월했고, function과 logic도 깔끔해 개인적으로는 편하게 잘 들을 수 있었다. R 코딩이 구글 안드로이드라면, 파이썬은 애플 아이폰 같은 느낌이었다. 파이썬이 깔끔하고 예쁘고 세련된 느낌이라면, 실제 기능 많고 편한 건 역시 R 이랄까. 최종 과제까지 끝내고 다음 학기 데이터 3부작의 마지막 과정인 머신 러닝 machine learning 을 기다리고 있는데, 왠지 또 꾸역꾸역 하다 보면 뭔가 새로운 능력치가 쌓일 것 같은 느낌 같은 느낌이다.


두 번째 과목은 지난 글에도 소개한 적 있는 선거 관련 과목이었다. 교수는 Alexander Fouirnaies 인데, 선거, 투표, 캠페인 등을 주제로 연구하시는 분이었다. 젊고 잘 생기고(!) 거기에 성격까지 좋은 덴마크 국적 교수로 강의가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활기 있어서 정말 좋았다. 다만, 이 분 강의의 개인적인 최대 단점은 매 수업마다 15분 정도 토론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30명 정도 있는 강의실에 나 빼면 모두 영어 네이티브들인데 그들 앞에서 영어로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마치 손흥민 포함 국가대표 선수들 앞에서 내가 드리블과 슛을 매번 보여주어야 하는 정신적 부담을 지는 것과 같았다. 가끔 토론시간에 맞춰 화장실 가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걔네들이 가면 진짜 화장실 가는 것 같지만, 내가 가면 백 프로 토론 피해 도망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오줌도 참아가며 열심히 버텼다. 덕분에 남의 말을 끝까지 잘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대신 본인 의견 표명은 극히 삼가는 동방예의지국의 모범 인간상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듣기만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압권은 바로 세 번째 과목인 환경 연구 과목이었다. 교수는 Don Coursey 로, 경제학자이자 과거 정책대학원 원장도 역임하신 분이셨다. 이 분의 강의 스타일은 정말 내가 생각했던 딱 아메리칸식이었다. 일단 청바지에 흰 티를 주로 입으셨고 오래된 큰 가죽 가방을 항상 손에 들고 오셨다. 그리고 강의 시작과 동시에 직접 손으로 (갈겨) 쓴 강의자료를 나눠주고 강의를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도무지 강의자료를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페이지에 평균 열 개 단어 정도만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 수업에 있어 나의 미션은 교수님의 말을 들으며 과연 이 글자가 무슨 단어인지를 맞추는 것이었다. 이거 은근 긴장되고 재미있는 게 말도 빠르셔서 잠시 딴생각하면 진도가 이미 훅 나가 있었다. 결국 수업 내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만 했다. 이 수업은 강의 외에는 과제도 없었고 시험도 없었다. 대신 12월 9일까지 연구 페이퍼 하나만 내면 되었다. 이런 온전한 자유를 내가 누리게 되다니, 이제야 내가 비로소 태평양을 건너 자유의 나라인 미국에 온 것 같았다. 이후 나는 수업을 들으며(아니 단어를 맞추며) 즐겁게 한 학기를 보내었다. 그러다 어느새 12월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과제를 내야 했다. 사실 분리수거는 꼬박꼬박 하는 나였지만, 솔직히 환경은 내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시간은 흐르는데 주제도 못 찾고 한참을 헤매고 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과거 대학시절 아르바이트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맞아, 그렇지. 대략 짧은 썰이다.


2001년 여름방학, 나는 월마트 Walmart 검수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맞다, 미국에 있는 그 월마트였다. 그 당시 월마트는 한국 진출을 선언하고 대전 고향 집 근처에 대전점을 설치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검수팀은 월마트에 들어오는 물건에 대해 일일이 상태를 체크하는 일을 하는 부서였다. 보통 물건은 팔레트 단위로 들어오는데, 박스 수가 맞는지 그 안에 제대로 물건이 들어있는지를 확인하고 마트에 입고시키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검수받는 업체 입장에서는 검수팀이 갑이었다. 그렇다고 갑질 하고 막 대하고 그런 느낌은 아니었고, 대학생인 나에게도 다들 살갑게 잘 대해주셔서 기분 좋게 일했다는 기억 정도였다. 중요한 업무여서인지 팀에 대학생은 나 혼자였고 다른 분들은 전부 다 정직원이었다. 업무 프로세스는 단순했다. 업체가 물건을 가지고 와서 사무실에 송장(invoice)을 제출한다. 사무실은 내용을 확인한 후 검수팀에 송장을 전달한다. 이때 검수팀은 업체 대기상황 및 내부 적치 상황을 확인한 후 방송을 통해 물건 출입을 통보한다. 그러면 업체에서 물건을 가지고 입장하고 이후 검수절차가 진행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송장을 받아봤는데 도저히 알 수 없는 이름의 품명이 적혀있었다. “쓰봉”이었다.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 단어였다. 혹시나 나만 모르나 싶어 옆에 있던 직원 형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형 혹시 쓰봉이 뭔지 아세요. 단일 품목에 박스 수는 많지 않은데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경험 많은 그 형도 마찬가지였다. "욕 인가?" 이후 몇 명이 함께 모여 이야기해봤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결국 업체 직원을 방송으로 호출했다. “OO업체 담당자 잠시 들어오세요.” 느닷없는 호출에 나이 드신 아저씨 한 분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아니 그건 아니구요, 근데 도대체 쓰봉이 뭔가요?” 순간 아저씨가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아.." 하지만 이내 대답을 이어가셨다. “아 저기, 쓰레기봉투요. 담당 직원이 시간이 없어 급하게 썼나 보네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를 포함한 직원 모두가 멍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같이 웃었다. 쓰봉이 쓰레기 봉투의 약자라니. 이후 우리는 그 업체 호명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냥 "쓰봉 들어오세요" 라고 했다. 추억 끝.


그래, 맞아. 나에게는 쓰봉이 있었지. 역시 환경문제에는 쓰봉이지. 그래서 나는 “쓰레기봉투 가격 상승이 재활용과 쓰레기 수거량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페이퍼를 쓰기로 했다. (갑자기??) 그리고 서울 25개 자치구 대상 8년 동안의 쓰레기 관련 자료를 모아 “지역, 시간 고정 효과 모형”을 만들어 분석을 하기로 했다. 가설은 “쓰레기봉투 가격이 상승하면 공짜인 재활용 분리수거를 늘리고 유료인 쓰레기봉투 사용은 줄일 것이다”였다. 그리고 첫 과정은 데이터 수집이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데이터 수집이 정말 어렵다. 데이터를 잘 모아놓지도 않을뿐더러, 엑셀이 아닌 한글 워드프로세스 안에 표로 내용을 예쁘게 작성해 놓는 악행을 벌이기도 한다. 쓰봉 가격의 경우 연도별 통계가 없어 뉴스 검색어 넣어가며 하나하나 찾아야만 했다. 나는 오랜 기간 20리터 쓰봉과 5리터 음식물쓰봉 가격과 씨름해야 했고, 생활폐기물을 엑셀로 분리하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얘는 매립, 얘는 소각, 얘는 재활용, 쟤는 가연성, 쟤는 불연성 등등. 그렇게 쓰봉 데이터와 불철주야 싸움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 맥북에서 쓰레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은 데이터를 취합하고 분석해서 가설과 부합하는 결론을 얻어냈다. 눈물겨운 완성이었다. 페이퍼 작성은 Rmarkdown 파일로 했고 수식은 Latex로, 통계분석은 R로 작성하였다. 외국 논문 읽으면서 얘네는 왜 이렇게 페이퍼가 깔끔하지 궁금했는데 해보니 코딩으로 작성하면 되는 거였다. 워드가 아니였다니.


12월 8일 밤, 드디어 마지막 수정을 거쳐 교수님 메일로 파일을 보냈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가죽 가방을 옆에 둔 채로 내 페이퍼를 읽고 있을 교수님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2001년부터 이어 온 쓰봉과의 오랜 인연이 이제야 끝맺음을 맺는 듯했다. 이제는 더 이상 쓰봉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 한다. 안녕, 쓰봉. 니 덕분에 좋은 주제로 페이퍼 썼어. 잘 가.


ps. 월마트에서 산 쓰봉이 들어있는 쓰봉통 옆에서 열심히 농구 연습 중인 농구 천재 준쎄오, 그리고 체조천재 민쎄오


매거진의 이전글 54. 코딩지옥 in 시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