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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Jul 31. 2017

이것은 일반적인 전쟁영화가 아니다

덩케르크 Dunkirk 감상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를 보고 왔다.


바쁜 분들을 위한 3줄 요약은 이렇다.


1. 연출력은 '역시' 놀란이었다.


2. 다만, 특별한 내러티브가 없는 전쟁다큐 정도의 줄거리는 아쉬웠다.


3. 그럼에도 100분을 긴장감 있게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시간 있는 분들을 위해 나름의 썰 풀기를 시작하겠다.


0. 솔직히 난 크리스토퍼 놀란의 빠이다. 나는 <메멘토 memento> 개봉 첫날 아무 정보 없이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멘붕에 빠져 걸어 나왔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사실 편집 안 한 영화를 트는 줄 알았다. 흑백으로 나오다가 컬러로 나오다가 죽었던 사람이 살아 나오고 막 이래서 심각하게 영상사고가 난 게 아닐까를 고민하는데 영화 러닝타임의 반을 보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스토리 이해는커녕 솔직히 주인공(가이 피어스)의 문신 밖에 기억이 안 남았다. 본격 타투 홍보 영화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대한문신협회에 문의는 무슨 그냥 속으로 욕만 하고 나왔다. 15세 이상 관람가가 아니라 대학교 학사 이상 학력을 가진 40세 이상 전문직 이상 관람가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장소는 동대문 메가박스 2관이었다.


집에 왔는데 정말로 열이 받아 잠이 안 왔다. 여동생이 재밌었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오빠가 비싼 돈 들여 동대문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이해가 안된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계속 묻는다면 "내가 15세가 지난 지 5년밖에 안돼서 그런 것 같아"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암튼 짜증이 났다. 인터넷을 통해 메멘토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그래 나도 많이 놀랐다 너가 그런 작품 만들지 몰라서. 줄거리는 단기 기억상실증, 그래 컬러 화면은 현재 이야기의 역순으로, 흑백 화면은 과거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한다는 거지. 옳거니. 이걸 알고 가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면서 보니 그렇지.


재도전을 하러 갔다. 역시 동대문 메가박스로 향했다.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 뒷골목 떡볶이로 배도 채웠다. 2관으로 재입장. 똑같은 좌석에 앉았다. 들어갈 때 표 검사하는 알바에게 이번엔 다르다는 의지의 눈빛도 보내줬다. 그러고 봤더니 대단했다. 내 머릿속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재미가 있었다.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집중한만큼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영화를 다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남다른 성취감이 있었다. 그 때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게 되었다. 나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한 편의 영화와 함께.


이후 스토리는 다들 알다시피이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인셉션, 인터스텔라 모두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이다. 그리고 이 영화 <덩케르크>이다. 과연 어떨지 많이 기대가 되었다.



1.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력은 역시 '갑'이다. 나름 영화 좀 본 사람이라 훈수 좀 두고 싶어도 놀란의 영화는 신기하게도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어떤 영화를 보면 저 장면은 좀 필요가 없는데 저 인물은 약한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놀란의 영화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마 놀란 성격이 원래 까칠해서인지 내용상 덜어낼 만한 구석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보통 캐릭터 설명도 들어가고 여기가 어디고 누가 누군지 이름이라도 불러줄 법한데 아님 자막이라도 넣어줄 만 한데 그런 게 전혀 없다. <덩케르크> 영화에서 생각나는 이름이 딱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톰 하디가 연기한 전투기 조종사였고, 나머지 하나는 프랑스 병사였던 깁슨이었다. 패리어는 하도 "패리어 제발"을 외쳐서인지 기억이 난다. 상황 연출을 통해 캐릭터를 만들어내므로 사실 이름은 별로 안 궁금하다.


담백한 연출은 메멘토, 다크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전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개에 필요한 내용만 효과적으로 전달하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좀 불친절하다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이 놀란 영화의 매력인 것 같다. 약간 상남자 같은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영화는 영상, 음악, 각본 등이 잘 엮어져 있다 보니 거슬리는 부분 없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정말 재주꾼이다. 귀중한 남의 시간을 이렇듯 눈 깜짝할 틈 없이 잘 뺏어가는 저승사자 같은 사람 ㅎㅎ 암튼 실제로 이렇게 '잘' 엮어서 만드는 감독 흔치 않다. 나는 이를 훌륭한 각본의 힘이라 생각한다. 물론 놀란이 썼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말 연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역시 엄지 척이다.



2. 한스 짐머의 음악도 역시 '갑'이다. 그간 놀란의 영화에서 줄곧 음악을 맡아왔기에 이번에도 역시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전혀 낯설지 않은 조합이었다. 박찬욱 감독과 조영욱 음악감독의 조합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다. 짐머의 음악 자체가 이미 하나의 고급 브랜드이기에 기대가 많이 되었다.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적재적소에 나오는 음악들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충분했다. 음악을 만들어놓고 만든 음악에 영상을 찍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음악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독일 전투기 날아올 때마다 들리는 노래 느리게 거꾸로 감는 듯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울렁거렸다. 그 소리 들릴 때마다 내가 덩케르크 해안에 서있는 군인마냥 긴장되었고 시간이 소리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위급한 상황에서 나오는 음악들은 마치 내가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만들기에 충분했다.



3. 스토리는 단순하다. 영국군이 프랑스 북부 해변 덩케르크에 갇혀있다. 그들은 영국 해군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배는 좌초되기 일쑤이다. 결국 민간어선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영국군을 구출하게 되고 작전은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40만이 탈출했다고 한다) 이를 둘러싸고 3가지 스토리가 동시에 진행된다.


메인 스토리는 인공 항구인 mole에서의 1주일이다. 3명의 군인이 탈출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그려진다.

서브 스토리는 민간 어선에서의 1일이다. 해군에 의해 징발되었지만 스스로 덩케르크로 향하는 3명의 영국 국민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다른 서브 스토리는 전투기에서의 1시간이다. 역시 3명의 공군 비행사가 독일 전투기를 격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기 1주일, 1일, 1시간이라는 3가지 스토리로 세분하고 각기 3명의 캐릭터를 배치함으로써 긴박감 있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지루함은 없지만 특별한 내러티브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아쉬움은 있다. 덩케르크 구출작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사건의 인과관계, 결말 등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며 따라서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덜한 느낌이다. 당시의 덩케르크 상황 그 자체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느낌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감독이 영화라는 미디어를 잘 활용하기 때문에 그런 것 일 수 있다. 소설이나 희곡이 아닌 영화는 그 상황 자체의 표현 만으로도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었던 것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였다. 아시다시피 내용은 심플하다.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하던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분)는 폭파된 인공위성의 잔해와 부딪히면서 그곳에 홀로 남겨졌지만 역경을 헤치고 노력하여 지구로 살아 들어온다'이다. 정말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 영화는 압도적인 CG와 연기로 그 갭을 잘 메워냈고 완성도 높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놀란의 <덩케르크>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 상황 자체의 표현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 만으로 작품을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네이버 베스트 평점 중 하나가 "한 시간 반 동안 덩케르크에 있었다"이다. 이 한 문장보다 <덩케르크>를 잘 표현하는 문장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4. 이것은 일반적인 전쟁영화가 아니다. 일반적인 전쟁영화와는 괘를 달리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내러티브 있는 스토리가 있지도 않고, <허트 로커> 같이 전쟁 미션에 몰두하지도 않으며, <쉰들러 리스트> 같이 독일의 만행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람보>처럼 한 명의 히어로를 위한 전투물도 아니고, <블랙호크다운> 같이 군대의 팀워크가 살아있지도 않다. <진주만>처럼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도 없다.


그냥 덩케르크에서 혹한에 영국 군함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도구는 전쟁이지만 재료는 사람이다. 연합군의 일원이지만 프랑스 군인은 태우지 않는 자국우선주의도 나오고, 영국군 인척 하던 깁슨부터 사지로 떠미는 개인 이기주의도 나온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놀란은 그 점에 집중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첫째 아들을 잃었지만 조국의 아들들을 구하기 위해 덩케르크로 무작정 떠나는 아버지의 이야기

용감무쌍한 전투기 조종사였지만 격추된 후에는 전쟁 공포증에 사로잡혀 겁쟁이처럼 보이는 군인의 이야기

덩케르크를 탈출하기 위해 영국 군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살아가는 프랑스 군인의 이야기

전투기 기름이 다 떨어져 가지만 더 많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고 적진으로 떨어지는 전투기 조종사의 이야기


전쟁이라는 상황이 특수할 뿐이지 모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국적 상황에서도 낯설지 않은 보편적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쟁과 덩케르크 사건보다는 사람에 집중하는, 그래서 일반적인 전쟁영화와는 거리가 있는 전쟁영화가 된 것이다.



5. 그래서 추천한다. 예술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전쟁영화 역시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래비티>를 통해 우주의 질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영화 <덩케르크>를 통해 살아있는 전쟁을 체험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마치 덩케르크 해안에 줄 서 있는 군인이 된 것처럼, 그래서 추운 날씨에 하염없이 손을 비비며 영국 군함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긴장하며 영화를 관람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100분이 후딱 지나갔다. 내 앞에서 포탄이 터지고 나를 향해 총알이 날아들어오는 느낌을 시종일관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기 전까지 긴장감이 유지되었던 것 같다. 거기다 모두가 좋아하는 해피엔딩의 결말이었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긍정적 에너지까지 분출되어 기분 좋게 극장을 나설 수도 있었다. 아마도 영국 국민들은 보면서 애국심이 폭발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영화 하나로 놀란 감독에 대한 평가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크리스토퍼 놀란은 검증된 감독이자 영화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영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기대를 하게 만드는 영화였던 것 같다.




** 개인적 명대사 : Where is f*** the bloody air force?

(독일 전투기가 계속 폭격하자 군인 중 한 명이 소리치며) 영국 공군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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