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Yuval Harari 의 사피엔스 Sapiens 는 "인류 문명사에 대한 거대한 서사" 라고 평가받고 있다. 수렵채집, 농업혁명, 인류의 통합, 산업혁명, 미래혁명 등 인류의 역사를 시간 순에 따라 매끄럽게 잘 서술해 놓았기에 독자들로 하여금 지식과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책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사피엔스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은 그 내용 중 돈(화폐)에 대한 서술이 현재의 비트코인의 미래와 관련하여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피엔스 중 제10장 돈의 향기 부분을 살펴보자. (읽고 이해한 내용을 개인적인 생각을 담아 정리하였다)
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신뢰이다. 그 자체로는 내재적 가치가 없는 물건을 사람들이 화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신뢰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실제 돈으로 변신한다. 예를 들어 은으로 만든 주화를 사람들이 교환가치가 있는 돈으로 신뢰하는 순간 은화는 실제 돈이 된다. 물론 신뢰하기 직전까지 그것은 그냥 단순한 물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은화를 어떻게 실제 돈으로 신뢰하게 되었을까. 당시는 사람들이 은 자체를 귀하게 여길 때가 아니었다. 따라서 지금의 (보석으로서의) 은처럼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은 자체를 돈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은화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은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크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곧 은화의 가치를 담보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은화가 화폐의 가치를 갖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은화에 대한 상호 신뢰 시스템이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이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은화를 기꺼이 돈으로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로마 황제의 얼굴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본인의 이웃들이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웃들 역시 그들의 다른 이웃들이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것을 신뢰하였다. 사람들 모두가 그것을 믿는 이유는 그들의 왕 역시 그것을 믿고 그것을 세금으로 받기 때문이며 그들의 사제가 역시 그것을 신뢰하여 십일조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누군가가 모든 재산을 팔고 은화를 받아 다른 곳에 가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은화를 받아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요약하면 무언가가 돈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 간의 상호 신뢰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비트코인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비트코인 bitcoin 은 전자화폐 electronic cash 혹은 암호화폐 cryptocurrency 라고 부르며 실물 없이 온라인 상으로만 존재하는 돈이다. 2009년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하다가 최근 가치가 상승하면서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이와 관련한 논쟁 또한 뜨겁다.
JP모건의 최고 경영자 제이미 다이먼 Jamie Dimon은 비트코인을 사기라고 폄하하며 사지 말 것을 권하기도 하지만 (기사 참고), 그의 권고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구입하고 있어 가치가 점점 오르는 상황이다. (물론 변동성 fluctuation 이 매우 커서 미래를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비트코인이 투기일지 아님 돈(화폐)으로의 정착과정일지에 대해 매우 궁금해한다. 비트코인을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나 역시 궁금하다. 물론 궁금증의 방향은 무척이나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종국적으로 비트코인 가격 상승(하락 or 지지) 여부겠지만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비트코인이 돈(화폐)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피엔스의 인류 역사에 견주어보자.
전술한 것처럼 어떤 물건이 돈(화폐)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신뢰해야 한다는 전제(상호신뢰 시스템)가 성립해야 한다.
비트코인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통화가 아니기 때문에 신뢰에 있어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은 사실이다. 비트코인은 로마 은화와 달리 실물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지도 않다. 따라서 단기간에 신뢰가 형성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신뢰는 실물에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 법, 문화 등 비가시적인 많은 것들(유발 하라리는 이것들을 모두 상상의 산물이라 말한다)에 우리는 이미 많은 신뢰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개체들 상호 간의) 상호 신뢰 시스템이 형성돠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트코인의 실물 유무와 신뢰 유무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 황제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그 자체에 대한 상호 신뢰이다.
이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사고 보유하고 팔고 있다. (내 주변에도 꽤 된다) 또한 비트코인으로 구입 가능한 물건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현재는 비트코인 수요가 많지 않지만 점차 수요가 늘어난다면 어느 순간 법정화폐와 동일한 지위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수요가 늘어날 수 있을까? 이는 다소 긍정적으로 보인다. 여러 군데에서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i. 아프리카 등 정국이 불안한 나라들의 경우 비트코인을 자국의 실물화폐보다 더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기사 참고)
ii. 베네수엘라 등 하이퍼인플레이션 국가의 경우에도 자국 화폐보다 비트코인이 더 안정적이다. 비트코인 등락폭이 1년에 50% 내외라면 베네수엘라 물가상승률은 1년에 4000%가 넘는다. (기사 참고)
iii. 익명성이 필요한 지하경제에서는 비트코인이 공식 화폐로 자리 잡을 것이다. (기사 참고) (우리나라의 경우 지하경제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24%인 372조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전 세계로 따진다면 더 어마어마한 양일 것이다)
iv. 비트코인은 현재 암호화폐의 기축통화이다. 또한 공급 총량도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다. (현재 1600만 개 정도만 채굴된 상태이다) 어느 정도 거래가 순환이 이루어지고 나면 희소성을 갖는 재화로 자리 잡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결국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치의 큰 변동은 어느 순간 잠잠해질 것이다. 균형점 balance 은 지금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서도 훨씬 낮은 가격에서도 모두 가능한데 그건 결국 시장 market 이 결정해 줄 것이다. (화폐가 된다는 것이 곧 높은 가치를 담보한다는 뜻은 아니니 무분별한 투자는 위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규제를 시작하고 여러 분야에서 논쟁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비트코인의 균형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비트코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비트코인이 사회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이 네덜란드의 튤립 거품과 같다고? 튤립으로는 물건을 살 수 없지만 비트코인으로는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정말 큰 차이다.
2018. 1. 11. 추가
+ 골드만 삭스에서도 같은 논리로 비슷한 전망을 내놓았다. <기사참고>
2018. 1. 30. 추가
+ 한국 소셜커머스 위메프 WEMAKEPRICE 는 비트코인을 결제수단으로 추가하려고 한다. <기사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