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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Feb 28. 2022

도움의 품격 (1)

현경이랑 세상 읽기 1

<인권연대 숨> 소식지 제118호(2022년 2월 25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서는 우리 삶 속의 크고 작은 일들을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하게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 아래의 이야기는 픽션일 수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허구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바로 당신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어느 고등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수여해 달라는 취지였다. 1인당 20만 원씩 총 열 명이 받을 수 있었다. 학년부장 교사로부터 이 장학금에 대해 안내받은 담임교사 A는 자신의 학급 학생들 중 B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B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여러 사정으로 각종 정부 지원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A는 B와 B의 어머니로부터 동의를 받아 B를 추천했고, 그렇게 해서 B는 장학금 수혜자가 됐다.


     예전에 A와 상담을 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털어놓을 때, B는 혹시 누가 들을까 두려운 듯 자꾸만 주변을 살피며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쌤, 이 얘기 진짜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요. 친구들이 모르게 해 주세요.”

     “물론이지. 걱정하지 마.”

     이번에 A가 장학금 이야기를 꺼냈을 때 B는 “네, 좋아요!”라고 무척 반갑게 말했지만 곧이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거 애들 앞에서 받는 거예요?”

     “아니, 통장에 입금해 준대.”

     그제야 B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장학금이 입금되기 며칠 전 A는 학년부장 교사로부터 이런 공지를 받았다. 내일 몇 시 몇 분에 교회 사람들이 교장 선생님을 방문할 예정이니 장학금 받는 학생들은 교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교장실에 와서 교회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장학금 받는 학생들은 각자 예쁜 편지지에 교회분들께 감사 편지를 써 오라는 것. 사진 건은 교회 측에서 원한 사항이고, 편지 건은 교장 선생님께서 ‘교육적 취지에서’ 지시하신 사항이라고 했다.


     A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B는 얼굴이 흙빛이 됐다. 편지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진 찍는 것도 너무 창피하다고 했다. 거의 울 것 같았다.

     “그냥 형식적으로 몇 줄만 써. 그리고 사진에 네 얼굴은 어차피 새끼손톱보다도 작게 나올 거야. 신경 쓸 일 아니야.”라고 말하며 A는 자신이 B를 잘 달래고 있다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B는 다음 날까지 편지 쓰기, 사진 찍기 등의 임무를 완수했다. A가 보기에 힘겨워 보였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일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굴욕감과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A는 알았다. A 자신이 B였어도 몹시 굴욕감을 느끼고 상처를 입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공짜로는 못 주겠다는 건가? 20만 원 받으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르라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A는 분노했다. 그런데 학교 안의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 동료 교사들은 정말로 이 ‘감사 편지 쓰기’가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A의 분노는 대체로 도움을 주는 자의 입장보다는 도움을 받는 자의 처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감수성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A는 B의 얼굴을 흙빛으로 만든 그 공지 사항을 들었을 때 자신이 교장에게 항의했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의 비겁함에 대해 B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바로 A 자신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A는 ‘도움의 품격’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어떤 도움은 천박하고 야만적이다. 도움을 제공하는 자의 ‘가오’와 ‘뽀대’를 살리기 위해 수혜자에게 수치심을 준다.

     내가 누군가를 도울 때 나는 진심으로 그를 나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는가? 그의 어려운 처지를 나의 도덕적 만족감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얼마나 치열하게 던지고 냉철하게 답해 보는가에 따라 ‘도움의 품격’이 달라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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