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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Mar 29. 2022

도움의 품격 (2)

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소식지 2022 3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실린 글입니다.


     “……그렇게 미웠던 그 사람에 대해서 어느 순간 기적처럼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까?’ 온통 그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힘든 사람이니까 내가 도와줘야겠다 싶었어요.”

     남자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감격하고 있었다. 타인의 힘겨움에 대한 내 공감 능력이 꽤 자랑스러웠다. 그랬기에 당연히 “현경 씨는 역시 참 좋은 사람이에요.”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건만, 남자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놓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건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네?”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까만 생각하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어? 네?”

     “그 사람이 얼마나 즐거울까를 생각하는 게 그 사람에 대한 예의죠.”


     처음엔 그 말이 섭섭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 대화를 나눈 지 어언 7년이 지나 있고 그때의 그 남자친구가 내 남편이 되어 있는 지금까지도 종종 그때 그의 그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얼마나 즐거울까를 생각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예의다.’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려고 할 때 주의를 다해 기억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 도움의 수혜자가 가난하다거나 장애가 있다거나 중병을 앓고 있다거나 기타 등등의 사유로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쌍한 사람’의 위치에 있다면 더더욱. (물론 나는 이 ‘일반적인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도시 빈민 계층에 속했던 청소년기의 내가 당시 가장 미워한 사람들은 바로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례하게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쯧쯧, 저 집 좀 봐. 어디 사람 살게 생겼어?’

     “너희 가족 아직도 거기 살아? 그 좁은 데서 어떻게?”

     어떤 이는 드러내 놓고 말하고 어떤 이는 눈빛으로 말했지만, 아무튼 그들의 친절에는 이런 무례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게 왜 무례함이냐고 또는 그들의 속마음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거야말로 ‘감수성’의 영역이라고 대답하겠다. 대체로 도움을 주는 자의 입장보다는 도움을 받는 자의 처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감수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이다. ‘무례하게 친절한 사람들’이 주는 도움은 그게 쌀 한 가마니든 봉투에 든 돈이든 결국은 내게 상처를 줬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들은 낫지 않고 있다.


     청소년기의 내가 좋아한 사람들은 몹시 허름한 우리 집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 사람들, 오히려 그 집에서의 일상 속 즐거움을 이해하는 이들이었다. 이를테면, 우리 옥탑방을 아지트 삼아 함께 오르락내리락하며 신나게 놀던 친구들, 그리고 당시엔 아직 많이 어렸던 내 말들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준 몇몇 어른들 말이다. 그들은 나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준 이들, 나의 삶이 지금 이 상태 이대로 얼마나 즐겁고 재미나고 가치 있는지 잊지 않게 해 준 이들이다. 그들이 준 도움이 귤 한 알이건 과자 한 봉지건 아니면 오히려 내게서 뭔가를 받아 가기만 했건,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의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에게서 진짜 도움을 받았다. 삶에 대한 사랑을 키우게 해 주는 도움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의 중요성을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는 데서 도움의 행위는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력이 거기서 멈춘다면 우리가 행하는 도움의 품격도 딱 거기서 멈출 것이다.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주면서 동시에 상처를 주는 수준에서 말이다.


     내가 도움을 주려는 누군가를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 자신과 동등하게 여긴다면, 진정으로 그를 존중한다면, 아마도 그에게 이렇게 다가서게 되지 않을까?

     “하루 중 어떤 순간이 가장 좋으세요? 가장 즐거울 때는 언제인가요? 언젠가 그 즐거움에 저를 초대해 주시겠어요? 당신의 그 즐거움이 부러워서요. 그리고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힘든 점에 대해서는 도움을 조금 드려도 될까요? 괜찮으시다면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쌍한 아이’였던 내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진짜 도움을 준 이들은, 나를 불쌍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이 글을 쓴다.   <끝>


* 그림: 박현경,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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