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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Sep 22. 2022

어정쩡한 시간 속에

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2년 9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실린 글입니다.


     ‘거기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최종적인 답을 얻으려고 떠났다. 교사인 내게 비교적 자유로운 기간인 1월, 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의 대학교에서 어학 수업을 듣고 지역 노숙인 쉼터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한 달 동안 현지인들과 부대껴 살며 얻은 결론은, 할 만하겠다는 것.


     ‘좀 외로울 때도 있겠지만, 살아갈 수 있겠어.’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 이미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 일 년간 차근차근 준비하자. 유학 절차를 밟아서 내년에 다시 오자. 그리고 공부하면서 여기 뿌리를 내리는 거다.’

     그렇게 귀국해 2월을 맞았다. 전공에 딱히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간절히 ‘떠나고 싶어서’ 뚫어 온 길. 지금까지의 삶을 벗어 던진 채 훌훌 멀리 날기 위해 수년째 독하게 어학 공부를 하고 차곡차곡 저축을 해 온 터였다. 그리고 이젠 정말, 떠날 길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시점이 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가난하신 부모님, 앞으로 밟을 수속들, 그리고 또 정리해야 할 직장 일까지……. 머릿속이 복잡했고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노트북 앞에 앉아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하고 계획을 세우다가 마침내 고민에 빠져 버리는 식으로 진척 없는 하루하루가 흘렀다. 마치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언제 바뀔지 모를 신호를 기다리듯 어정쩡하게 흘려보내는 시간. 목적지를 지척에 두고 제자리걸음하는 듯한 답답함. 불안하고 싱숭생숭한 2월이었다.


     그래서 날마다 걷고 또 걸었다. 들끓는 생각들을 가다듬어 보려고. 한 시간여를 걸어 시내 중심가에 가서 인파 속을 표류하듯 쏘다니다가 또다시 한 시간여를 걸어 자취방에 돌아오는 코스. 하염없이 걸으며 ‘떠난 후’를 상상했다. 이도 저도 아닌 듯한 지금 이곳의 나날을 무사히 건넌 후 그때 그곳에서 맞이할 그 ‘본격적인’ 삶을…….


     그간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느라 어쩔 수 없이 얽매여 있던 온갖 제약들에서 벗어나, 그곳에서 훨훨 날갯짓하며 살리라. 물론 그곳에도 현실은 있고 그곳 나름의 제약들이 있겠지만, 지금 여기와는 다를 것이다. 백지에서 시작하자. 제로에서 시작하자. 떠나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지고 생각은 미래 속을 하염없이 헤엄쳤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친구들을 사귈 생각을 하며 걷노라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걷다가는 어느 허름한 커피집에 들르기도 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일기를 쓰거나 멍하니 있는 일이 내 걷기 코스의 일부가 됐다.


     그리고 그해 11월, 나는 결혼했다. 걷기 코스의 일부였던 그 커피집 주인이 바로 나의 남편이다. 더 이상 타국으로 떠날 필요는 없었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더 큰 날갯짓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해 2월, 나는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듯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걷게 될 본격적인 여정 생각에 자못 조바심치면서. 그러나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본격적인 여정은 이미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어정쩡한 시간 속, 이도 저도 아닌 듯한 순간들 가운데. 내 계획과는 사뭇 다른, 놀랄 만큼 자유롭고 신비로운 여정이……. 그리고 그 여정은 또 다른 놀라운 이야기의 시작일 것이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 기다리기. 언제부턴가 내가 즐기는 일이다. 어디에 왜 가고 있었는지 잠깐 잊은 채, 하늘 보며 바람결을 느끼는 시간. 어정쩡하게 흐르는 이 시간 동안 하루 중 가장 환한 햇살이 쏟아지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쩌면 인생의 멋진 일들은 어정쩡한 시간 속에 싹트나 보다. 버려지는 시간이란 없는가 보다. <끝>


그림_박현경,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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