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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Jul 28. 2022

봄날의 햇살

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2년 7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실린 글입니다.

* 그림: 박현경, <삶 3>


안녕하세요.
OO여중을 졸업한 R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리워하던 친구를 찾던 중에 혹 맞나 싶어 연락드립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2019년 11월 19일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세상에, R이 나를 찾아 주다니! 

   나는 반가워서 바로 답장을 했고 우리는 만났다.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중학교 때 얘기,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 등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로도 R과 나는 연락하며 지낸다.


1999년 10월 17일 일요일
나에게 신선한 힘을 주는 R. 하지만 그 애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부담스러운 존재 혹은, 숙제를 잘 빌려 주는 애니까 친근하게 대하지만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을까. 하지만 나는 R이 그렇게 이해타산적이거나 줏대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1학기 때부터 줄곧 월요일, 목요일마다 국사 책을 빌려 가고, 또 다른 아무 때나 숙제를 빌려 가고, 그냥 그럴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마침 D와의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친구와의 관계에도 서서히 위기감을 느껴 갈 무렵, 갑자기 점심시간에 매점에 가자고 맨 처음 R이 말했을 때 정말로 기뻤다. 그 후 우린 친해졌다. 자주 함께 매점을 들락거리고 집에 갈 때도 함께 다닌다. R은 왠지 모르게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색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중3 때 일기장에 남아 있는 R에 대한 기억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반에 R이 전학 왔고, 3학년 때는 서로 다른 반이 됐다. 내 기억에 우린 2학년 때보다 3학년 때 더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던 내겐, 성적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R이 멋있어 보였다. 내가 보기에 R은 어쩐지 항상 약속이 있을 것 같고, 나랑 노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 R이 실제로는 거의 매일 나랑 놀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 느낌은 그저 나만의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서로 다른 반이었어도 쉬는 시간에 자주 만나 놀았고, 매일 학교가 끝나면 둘이서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R과 수다를 떨고 장난치는 시간은 내게 무척 소중했다. 토요일에 R과 분식집에서 라볶기를 사 먹던 일, R이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일 등은 참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의 전시 소식을 알리러 오래간만에 R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R은 곧장 전화를 걸어 왔다. 전시 얘기, 그리고 이런저런 소식을 주고받다가 나는 최근에 우울과 공황으로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물었다.

   “너는 힘든 거 없어?”

   “음, 나는 힘든 걸 주로 어렸을 때 겪었던 거 같아. 내가 너 만났을 때가 제일 힘들었을 때거든.”

   “아, 정말? 난 전혀 몰랐는데…….”

   “중학교 때, 너 만났을 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때야.”

   그러면서 R은 드라마 얘기를 꺼냈다. 

   “너 우영우 알아, 우영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에 이런 얘기가 나와. 너는 봄날의 햇살이라고. 네가 나한테 바로 그런 친구였어. 처음 전학 갔을 때 전학 온 친구라고 챙겨 주고, 그 다음에도 아무 편견 없이 대해 주고……. 내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을 때 너는 나한테 봄날의 햇살 같은 존재였어. 그래서 내가 너를 다시 찾은 거야.”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이 문장들을 듣는 동안 머릿속이 다시 한 번 화락 환해졌다. 봄날의 햇살은 왜 마음을 울리는가. 내가 자신에게 봄날의 햇살이었다는 바로 그 말이 나에게 봄날의 햇살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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