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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Oct 22. 2022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이 글은 아래의 그림 ‘삶 26’을 감상하며 읽으셔야 더 재미있습니다.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2년 10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우리는 축축한 어둠 속에서 만났다. 어둠이 그토록 깊고 질퍼덕하지 않았다면, 영영 서로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즈음엔 검고 굵은 빗방울이 하염없이 내렸다. 하늘은 어두웠고 주위는 붉었다.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씩.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렵고 또 두려웠다. 모든 일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불안은 도무지 날 놓아주지 않았다. 무력감이 깊은 늪처럼 내 두 발을 잡아끌었다. 아래로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보니 그가 있었다. 눈 가장자리와 눈동자가 새빨갰다. 눈동자가 위아래로 , 육식 동물의 . 처음엔 섬뜩했지만  느낌은  사라졌다. 보면 볼수록 너무도 순진한 어린아이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아기자기한 코와 , 그리고 봉긋한 이마는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의 귀는 이마 꼭대기에 돋아 있었다.

     “나는 늘 깊은 곳에 있으니, 세상 소릴 들으려면 귀가 여기 있어야 해요. 이 귀로 듣고 있었지요, 당신의 혼잣말들을……. ‘두렵고 두렵고 두렵고 두렵다’, ‘도망치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그는 내게 자신의 등지느러미를 만져 보도록 허락해 주었다. 알록달록하고 둥글둥글한 등지느러미는 의외로 두껍고 단단했다. 흡사 거북의 등딱지 같았다.

     “나는 약해 보이지만 실은 강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나는 그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강하지요.”

      그의 두 다리에는 손이 달려 있었고, 양손의 손가락은 각각 일곱 개씩이었다. 손가락 끝마다 손톱 대신 붉은 눈[目]이 반짝였다.

     “처음에 나는 손이 없었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지요. 나는 손으로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그림 그리는 일 같은 것. 또는 당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일 같은 것. 오랜 세월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더니 손이 돋아나고 손가락이 자라났죠. 손가락 끝마다 눈[目]이 열렸고요. 이제 나는 손가락 끝으로도 볼 수가 있어요.

     내 두 손은 동시에 내 두 발이고 내 눈[目]들이에요. 당신에게 다가가는 발이자 당신을 만지는 손, 당신의 마음을 알아보는 눈[目].

     나는 괴상해요. 하지만 괴상한 그대로 아름다워요. 괴상함까지 포함해서 온전한 나예요.”

     나는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불안도 우울도 없는 곤한 잠이었다. 긴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작업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내 배 속에 있었다. 심장 속일까, 간 속일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 내 몸속에 있었다. 나는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그의 열네 손가락이 꼼지락대며 내 안을 비췄다.


     잠을 떨치고 일어나 한지에 붉은 물을 들이고 검정 물을 뿌렸다. 검정 빗속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강하고 당당한 그를 그렸다. 괴상함까지 포함해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를, 받아쓰기하듯 그렸다. 하늘도 땅도 그 어디도 아닌, 내 몸속에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를 받아 적었다. 그랬더니 바로 이 그림이 되었다.


     우리는 축축한 어둠 속에서 만났다. 어둠이 이토록 깊고 질퍼덕하지 않았다면, 영영 서로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즈음도 검고 굵은 빗방울이 내린다. 하늘은 어둡고 주위는 붉다.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무언가를 한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두렵고 또 두렵다. 모든 일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되고 있음을 알지만, 불안은 도무지 날 놓아주지 않는다. 무력감이 깊은 늪처럼 내 두 발을 잡아끈다. 아래로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문득 보면 그가 있다. 심장 속일까, 간 속일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 내 몸속에 그가 있다.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는다. 그의 손가락들이 내 안을 비춘다.


그림_박현경, 「삶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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