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너머
* ‘공동선’ 제176호 ‘두려움 너머’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제목: 나의 새벽이 세상과 이어져 / 글쓴이: 박현경(화가, 교사)
곤한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온다. 조그만 방에 불이 켜진다. 이부자리 바로 옆 작업 현장, 방바닥에 펼쳐진 미완의 그림. 어젯밤 작업하던 그 모양 그대로, 어질러져 있는 색연필 여러 자루. 덕지덕지 물감이 밴 신문지 여러 장. 여기서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작년 6월부터 관사(官舍)에서 지내고 있다. 작고 오래된 원룸형 공간이다. 여기로 들어올 작정을 했을 땐, 좁아서 작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이사 온 바로 다음 날부터 이곳은 손색없는 작업실이 되었다. 크레용, 색연필 등을 활용한 건식 작업은 물론이고, 물을 많이 사용하는 작업도 큰 사고 없이 해낼 수 있었다. ‘역시, 결국은 의지의 문제다.’라 되뇌며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커다란 붓을 휘둘러 물감을 뿌려 댔다. 여기 이 방바닥에 웅크린 채 새벽마다 작업한 작품들로 충북 청주에서, 그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를 했다.
작년 11월에는 큰 결심을 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 음성지회장 선거에 출마한 것이다. 필요한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며, 잘해 내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출마를 단번에 결심한 것은 아니다. 출마 결심을 망설인 이유는 오직 하나. ‘지회장 선거를 치르고, 당선 후 지회장으로서 활동하는 일이 그림 작업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까?’ 그것을 고민하던 며칠간도 역시 새벽마다 그림을 그렸고, 무수한 선을 긋고 또 긋는 사이 돋아나는 어떤 확신, 어떤 용기가 있었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활동가로서의 삶을 잘 조화시켜 나갈 수 있겠다.’라는 믿음.
선거 운동을 하는 2주 동안 26개 분회를 방문해 조합원들을 직접 만났고, 분회 방문 때마다 조합원 한 분 한 분께 손편지를 써서 진심을 전했다. 이후 음성지회장으로 당선돼 지난 1월에 임기 시작. 나의 삶은 전보다 훨씬 더 바쁘고 치열해졌다. 예전엔 한 명의 참여자로 함께했을 행사들을 이제는 내가 주도해 기획하고 진행한다. 참으로 많은 회의에 참석해 많은 일을 도모하고 많은 의견을 들으며 많은 의견을 낸다. 그런 속에서 여전히 변함없는 것은 새벽에 그림 그리는 시간. 지난 2월 파리에서 전시한 그림 중 나를 가장 뿌듯하게 한 작품들이 모두 지회장 선거를 치르고 지회장이 되어 바쁘게 활동하는 와중에 그려졌다. 새벽마다 선을 긋고 또 그었더니 그렇게 되었다.
이제 내게 예술가로서의 삶과 활동가로서의 삶은 분리할 수 없는, 종이의 앞면과 뒷면 같은 관계다. 그림에 방해가 될까 걱정했던 요소들이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작업을 더 절실하고 치열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런 상황은 나로 하여금 토마스 머튼의 다음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신학생 책임자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짐을 대신 짊어진 지도 6개월이 되었다. (중략) 그들이 새로운 어떤 것을 찾았는지, 하느님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들이 자신을 찾는 일에, 다시 말해 자신을 버리는 데 내가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안다. 내가 고독한 은둔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한때 걱정하던 일이 은둔 생활로 가는 유일하고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의 영적 일기 – 요나의 표징, 오지영 옮김, 바오로딸, 2009, 504쪽
활동가로서의 삶이 예술가로서의 삶을 보다 절실하고 치열하게 해 주는 한편, 예술가로서의 삶은 활동가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해 준다. 새벽마다 선을 무수히 긋고 또 그으며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세상 한가운데서 부당하고 불의한 상황들에 맞서 차분하고 힘 있게 투쟁해 나갈 용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새벽은 내가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단단히 연결된 시간이기도 하다. 좁은 방에 홀로 틀어박혀 그림 그리는 시간이 어떻게 해서 세상과 연결된 시간인지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 시간 동안 내가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과 밀접히 연결돼 있는 느낌, 즉 ‘연대의 감각’을 체험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연대의 감각’을 통해 이 새벽 시간은 세상에 나가 현실을 마주하고, 필요하다면 용감히 싸울 수 있는 힘을 내게 불어넣어 준다. 슥슥삭삭 색연필 선을 얹을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이는 용기가 있다.
그렇게 용기가 쌓이는 동안, 내 작업의 ‘내용’과 ‘형식’은 더욱 구체적으로 나를 세상과 연결해 준다. 작업의 ‘내용’ 면에서 예를 들면, ‘사회적 참사 앞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분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작업한 ‘네가 보고 싶어서’ 연작은, 나를 이 사회의 시린 고통과 이어 주고 내가 ‘연대의 감각’을 한층 더 예리하게 키울 수 있게 해 주었다. 요즘 작업하고 있는 ‘천사’ 연작은 ‘천사란 어떤 존재일까? 흔히 말하는 ‘천사 같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를 궁금해하며 시작한 연작인데, 천사란 무조건 착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비극을 눈 똑바로 뜨고 마주하며 그 슬픔에 참여하는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 작업의 ‘형식’ 면에서 예를 들자면, 자주 왼손으로 스케치를 한다. 투박한 선은 투박한 대로 비뚤어진 선은 비뚤어진 대로 둔다. 예쁘고 세련되게 그으려 애쓰지 않는다. 왼손으로 그린 연필 스케치 위에 오른손으로 색연필 선을 긋는다. 이때, 왼손이 그어 놓은 서툰 선을 오른손이 교정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주인공을 그릴 때만큼이나 배경을 그릴 때도 촘촘한 선을 긋는다. 어디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함부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림의 배경 부분 그 어느 구석을 캡처해 확대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작업하는 한 순간 한 순간 실천하는 이 방식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연대의 자세’이기도 하다. 서툴고 투박한 존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존중하기. 중심부와 주변부를 차별하지 않기. 주변부의 존재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여기기……. 새벽에 작업하는 그 마음, 그 자세로 오늘도 세상을 마주한다.
‘하느님의 음성이 낙원에서 들린다.
“한때 하찮았던 것이 지금 소중한 것이 되었다. 지금 소중한 것은 하찮았던 적이 없다. 나는 하찮은 것을 늘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나는 무엇이 하찮은 것인지 모른다.”’
위의 책, 546쪽
곤하고 곤한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조그만 방에 불이 켜진다. 방바닥에 웅크린 채 나는 작업을 시작한다. 가늘고 곧은 선을 긋고 또 긋는 사이 어느새 창밖이 환하게 밝아 와, 이제는 일어서 밖에 나가야 할 시간. 가슴속에 조용히 용기가 꿈틀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