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4년 9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 게재 글입니다.
제목: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 글쓴이: 박현경(화가, 교사)
“난 원체 무용(無用)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김희성(변요한 扮)이 말했다.
추석 연휴, 남편이랑 친정 부모님이랑 넷이서 서울 여행을 했다. 대림동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숙소에서 잠을 실컷 자고, 이태원 골목들을 산책하고,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우리가 걷고 음식을 먹는 속도만큼이나 시간도 느리게 흘렀다. 그 느린 시간 속에 차곡차곡 돋아나는 기쁨이 있었다.
이박삼일의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내겐 닷새의 휴일이 더 남아 있었다. 늦잠을 자고, 낮잠을 자고,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하고, 고양이들이랑 장난을 쳤다. 무용하고도 아름다운, 아니 무용하기에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이 ‘무용한’ 순간들 속, 그림 그리고 싶고 글 쓰고 싶고 무언가 새롭게 하고 싶은 의욕이 솟아났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시간 중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대개 ‘번외(番外)’의 순간들이다. 오늘 나가려고 마음먹은 수업 진도를 다 나가고 남은 5분, 중학교 1학년 친구들이랑 농담 따 먹기 하는 시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불쑥, 내가 일하는 한국어학급에 놀러 온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애와 간식을 나눠 먹는 시간. 그런 번외의 순간들은 학교에서의 일과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자, 내가 아직 학교를 때려치우지 않는 유일한 이유이다.
어린 시절에도 나를 길러 준 건 ‘텅 빈’ 순간들이었다. 뭔가를 배우거나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시간이 아니기에 계획표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이를테면 해 질 녘 손가락을 쫄쫄 빨며 창밖 하늘을 보거나, 인형 놀이를 하고 또 하다 지쳐 심심해하며 멍 때리던 시간. 그런 순간들이 모여 내 그림의 색감이 되고 내가 지어낸 새로운 이야기가 됐다.
그렇다. 심심한 순간들이 모여 내가 되었다. 무용한 순간들이 모여 그림이 되고, 번외의 순간들이 모여 글이 되었다. 텅 빈 순간들이 모여 삶이 되었다. 언뜻 보면 버려지는 듯한 그 숱한 순간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며, 나의 삶은 공허하고 메말랐을 것이고,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버려지는 듯한 순간들이 내 삶의 머릿돌이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 118,22)
그렇기에 나는 내 사랑하는 학생들이 무용한 순간들을 마음껏 누리길 바란다. 그들이 스스로의 삶에서 ‘쓸모’란 이름의 짐을 조금이나마 비워 내는 데에 도움이 되고 싶다. 버려지는 듯한 시간 속 공상과 웃음과 장난을 그들이 사랑하길 바란다. 번외의 텅 빈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자기 세계를 가꿔 가길 바란다.
이런 소망과는 달리 현실의 교육 시스템은 무용한 순간들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 마침내 삭제하려 한다. 학생들의 삶을 비워 내어 쉴 틈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투리 시간, 여유 시간까지 채우고 채우고 꽉 채워 빈틈없이 만들려 한다.
이를테면 충청북도교육청은 ‘다채움’이라는 이름의 ‘다차원 학생 성장 플랫폼’을 도입했다.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즐겁게 공부하려면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비워 내야 할 판에 무엇을 다 채우라는 것일까. 다채움이 생기면서 다채움 진단평가라는 시험으로 학생들의 부담이 꽉꽉 채워지고 교사들의 업무도 꽉꽉 채워지니 다채움이란 이름이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밖에도 틈새 시간을 활용하여 몸 활동을 하라는 ‘어디서나 운동장’, 공교육에 투입하는 비용을 소수의 학교와 학생에게 몰아주며 새로운 사교육 시장을 활짝 열어젖힐 ‘국제바칼로레아(IB) 교육’ 도입 등, 교육 정책은 대체로 ‘무엇을 더 비워 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채울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거듭되는 시험으로 문제풀이 양을 채우고, 아침 시간, 점심시간, 쉬는 시간마저 공문에 따른 활동으로 채우며, 지금 배우고 있는 것도 소화가 다 안 되는데 새로운 것들을 자꾸자꾸 머릿속에 더 욱여넣으라고 들이미는 ‘채움의 교육 정책’. 그 속에서도 나는 꿋꿋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 내 소중한 학생들과 무용한 순간들을 나눈다. 이것이 나의 투쟁, 나의 사랑이다.
그림_박현경, <천사 13>, 부분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