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큰 유산, 나의 자매
엄마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이 있다면 그건 동생일 것이다.
물론 다른 형제자매들도 각자의 소중함을 갖고 있겠지만,
같은 나이대에 같은 성별을 가지고 같은 기억을 공유하며 같이 나이가 드는,
그런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꽤 지지가 되는 일이다.
동생과 나는 3살 차이가 나고, 내가 생일이 빠른 덕에 학년으로는 4년 차이가 난다.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학교가 겹쳐본 적이 없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동생이 같은 중학교에 들어오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 학교에 동생이 들어갔다.
부모님이 맞벌이였던 탓에 낮에 동생을 돌보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애가 우습게도 동생의 부모 역할에 꽤 진지하게 임했던 것 같다.
엄마가 첫 출근을 하던 날 “이제 낮에는 엄마가 없으니까, 네가 엄마 대신이야.”라고 말했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 보면 그 역할이 내 가슴에 콕 박혔던 것은 확실하다.
그전까지 동생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였는데, 이젠 내가 얘를 전적으로 돌봐야 되는 상황이 됐다.
그날부터 나는 학교에서 맛있는 걸 나눠주기라도 하면 먹지 않고 바로 옆의 유치원에 들러서 간식을 전해 주거나
동생이 겁도 없이 학교를 들이닥쳐서 같이 수업을 듣거나
동생이 버릇없이 굴거나 숙제를 안 하면 벌을 주고 우는 동생을 안아서 도닥이는 것도 내 몫이었다.
(우습겠지만, 난 60년대 생이 아니다 ㅋㅋㅋ 밀레니얼 세대 후반부에 걸쳐 있다고!)
아직도 집안 어른들은 그때 얘기를 하면 어린 게 뭘 안다며 그렇게 했을까 웃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른 부모 품에 자라지 못한 동생이나, 아이 부모 역할을 한 나나 안쓰러워지는 대목이다.
어쨌든 말 그대로 내가 동생을 ‘업어 키운(걔도 동의할지는 의문...)’ 덕분에 동생은 대학생 때까지도 엄마를 두 명 둔 아이 같았다.
덕분에 동생은 엄마와 나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엄마와 나의 화도 동시에 받았다.
동생의 숙제를 봐주거나, 대학 진로를 고민하거나, 대학 과제에서 막힐 때 도와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동생에게 하는 것을 두고 혀를 내두르고, 동생 친구들도 내가 동생한테 하는 걸 보고 유난스러워했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 때까지 그녀의 포지션은 내 동생이라기 보단 내 딸에 가까웠다.
동생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엄마한테 기대듯 나에게 기댔다. 우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사춘기 내내 꽤 힘들어했는데, 대체로 가족관계나 친구관계에서의 어려움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머릿속에 빨리 대학을 졸업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으므로 동생의 그런 어려움에 딱히 공감하지 못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성적에 신경 써야 할 놈이 별 게 다 신경 쓰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매번 “너를 싫어하는 사람은 제쳐두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에 집중해. 너를 잘 모르는 사람들 말에 신경 쓰지 마.”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나는 그 당시에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좀 감정을 배제하는 면이 있어서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길 잘했다.)
동생은 내 말에 딱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공감을 못했던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실행을 못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는 누가 뭐래도 엄마 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애였다.
그 당시에 동생이 겪었을 외로움을 생각하면 크게 공감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스무 살 이후로도 동생은 계속 내 딸 같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우리의 감정적인 갭은 좁아졌던 건 확실하다.
기 센 엄마와 언니 사이에서 자란 동생은 둥글둥글한 성격에 공감의 신으로 거듭났다.
동생은 어느새 내 고민에 현명한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 있었다.
동생이 돈을 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집안 대소사를 다 챙기면서 욕받이 역할까지 해야 하는 K장녀 역할에 학을 뗀 내가 출가를 선언했다.
나는 집에서 짐을 챙기고 나가면서 “이제 네가 내 역할을 대신해라. “하고 선언했다.
동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다음생에 태어나도 장녀로 안 태어나고 싶어. 동생으로 태어날 거야.”
동생은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가족 중에 동생만이 내 출가를 응원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가족 중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에 큰 위안을 얻었다.
내가 출가를 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가 될 수 있었다.
동생은 나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내 힘으로 모든지 해야 되는 반면, 동생은 필요하다면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체로 120%의 에너지를 모든 일에 쏟는 반면, 동생은 적절히 에너지 배분을 할 줄 안다.
나는 내가 노력하는 만큼 타인에 대한 기대도 높다면, 동생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안다.
내가 집에 나가도 동생은 내 장녀 역할을 물려받지 않았다. 그래도 집은 잘 굴러갔다.
오히려 부모님과의 부딪힘이 적어졌다. 결국 내가 만든 감옥에 내 스스로 가둔 꼴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나는 K-장녀 컴플렉스에 시달린다. 자존감이 무너져 내릴 때면 인생 전체가 흔들거리는 느낌이다.
10대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단단하게 버텨냈는데 30대에 들어서면서 그럴 힘을 많이 잃었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나를 도닥인다.
더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노력하지 않는 노력을 해봐. 내가 엄마아빠랑 얘기해 볼게.
동생은 가까운 사람이 자신에게 못된 말을 해도 괜찮다고 했다. 대신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는 것들에 집중한다고.
엄마는 영원히 자신의 편이고, 감정적인 공감이 필요할 땐 나를 찾고, 지쳤을 땐 자신을 웃겨주는 남자친구를 찾는다고 했다.
공감이 어려운 사람에게 공감을 바라지 않고, 재미없는 사람에게 재미를 찾지 않아도 만족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생각한다고 했다. 저 사람을 받아줄 수 있는 나는 성숙한 사람이야.
아마 나랑 싸울 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속 좁은 언니보다 내가 성숙하니까 그냥 그렇다고 해줘야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척했을 동생을 생각하면 웃기고 미안하다. 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아직 사춘기를 지나지 못해서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내 감정을 들여다봐야 하는 10대에 성취를 생각하고
성취를 생각해야 할 30대에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참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반면 동생은 제 나이 때 겪어야 할 과정을 모두 겪었다. 나는 이제 그녀의 경험에 자주 기댄다.
그러고 보면 겨우 3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데 엄마의 역할을 채워 주려고 했다는 사실이 참 오만하다.
지금 가라앉는 마음을 겪을 때면 동생은 매일 같이 내 마음을 체크해 준다.
동생에게 가라앉는 기분을 한참 쏟고 나면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하다.
그녀는 공감만 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나와 전혀 다르게 생각할 때가 많아서 오히려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동생도 여전히 사회생활이든 사적인 관계든 힘든 일이 있으면 나에게 털어놓는다.
우리는 이제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되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동시대의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인생에 큰 위안과 지지가 된다.
초등학생 때 동생은 격하게 화가 나면 나에게 ”야“라고 불렀는데, 그게 그렇게 분해서 큰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이제는 동생이 이름을 불러도, 가끔 나를 애취급하며 귀여워해도 영 신경 쓰이지 않는다.
서른이 넘어서 호칭 따위로 싸우는 형제자매는 없겠지만, 실제로 내가 딱히 윗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탓이다.
부모님이 남겨준 제일 친한 친구. 나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 서로 어려울 때, 바닥을 쳤을 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막막한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진 느낌이 들 때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