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여름을 물들이는 클래식 축제
싱가포르 영국계 국제학교에 다닐 때, 한동안 클래식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 시절 음악 선생님은 커리큘럼에 나오는 곡들을 유튜브 영상으로 자주 보여주셨는데, 그중 많은 영상이 바로 BBC Proms였다.
유명한 연주자들, 역사를 품은 홀, 화려한 조명을 보며 나는 늘 생각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영국에 가서 저 무대를 직접 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런던에서 살고 있는 나는 벌써 네 번째 시즌(2022·2023·2024·2025)을 맞이하고 있다.
막연한 동경이 이제는 매년 기다려지는 나의 여름 루틴이 되었다.
BBC Proms는 1895년에 시작됐다. 지휘자 헨리 우드와 기획자 로버트 뉴먼은 “클래식을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마음으로 이 축제를 만들었다.
‘Proms’라는 이름은 Promenade Concerts에서 비롯되었는데, 서민들이 저렴하게 서서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전통 덕분이다. 지금도 그 정신은 이어져서, 스탠딩 티켓은 여전히 8파운드에 구할 수 있다.
싱가포르 시절 함께 음악을 하던 친구들이 런던에 살고 있어서, BBC Proms는 이제 우리만의 여름 루틴이 되었다. 올해는 그중 한 친구가 아기를 낳아, 결국 무대에 섰던 바이올린 전공 친구와 피아노를 치던 나, 이렇게 둘이 공연을 즐겼다.
매년 5월쯤 로얄 알버트 홀 웹사이트에서 시즌 프로그램이 공개된다.
나는 보통 이렇게 준비한다.
4~5월 공연 캘린더가 뜨면 ‘My Proms Plan’에 보고 싶은 공연을 담아둔다.
한 달쯤 뒤, 티켓 판매가 열리면 장바구니에 담아둔 걸 한 번에 결제한다.
올해는 5월 17일 오전 9시에 티켓이 열렸는데, 알람을 못 들어 늦게 일어났음에도 자리가 충분히 남아 있었다. 덕분에 원하는 공연을 어렵지 않게 예매할 수 있었다.
나는 여러 공연을 보고 싶어서 주로 Rausing Circle 좌석을 고른다. 꽤 괜찮은 자리인데도 20~30파운드면 충분하다.
올해 라인업은 특히나 훌륭했다. 임윤찬을 비롯해 솔로 연주자, 오케스트라, 오페라까지.
여름을 이렇게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페스티벌이 또 있을까 싶다.
피아노를 오래 쳐왔던 덕분에, BBC Proms는 나에게 사실상 피아노 페스티벌이다.
지금까지 Proms에서 만난 피아니스트만 해도:
조성진 – 2015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
임윤찬 – 2022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유자 왕 – 폭발적 테크닉으로 세계적 명성
랑랑 – 차이콥스키 콩쿠르 출신, 글로벌 슈퍼스타
한국에서 이들의 공연 티켓을 구하는 건 케이팝 티케팅만큼 치열하다. 순식간에 매진되거나, 남아 있는 건 몇십만 원대 자리뿐인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런던에서는 여름이면 BBC Proms를 통해 이들을 비교적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이게 바로 내가 여름마다 BBC Proms를 기다리는 이유다.
BBC Proms는 꼭 클래식만 있는 축제가 아니다. 2024년에는 샘 스미스의 무대도 열렸다.
화려한 의상과 파격적인 무대를 보여주던 팝스타가 로열 알버트 홀에서는 조신하게 등장했다.
샘 스미스는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Don’t worry, I’m not going to get my bum out. The clothes are staying on. This is going to be an appropriate show. Even I know there’s a time and a place.”
걱정 마세요, 오늘은 옷을 벗지 않을 겁니다. Proms에 걸맞는 공연을 할 거예요. 저도 때와 장소는 알거든요.
오케스트라와 함께 들은 Unholy는 특별했다. 라벨의 볼레로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편곡은 클래식 팬인 나에게 큰 선물 같았다. 팝과 클래식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게 Proms의 힘일지도 모른다.
BBC Proms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날의 무대다. Rule, Britannia!와 Land of Hope and Glory가 울려 퍼지고, 관객들은 국기를 흔들며 함께 노래한다.
하지만 티켓을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앞선 시즌 동안 구매한 티켓 수에 따라 추첨 기회가 달라지는데, 나는 매년 여러 번 넣었지만 한 번도 당첨되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 현장에서 직접 노래할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