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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London Life

5. 영국 직장인의 운전면허 교환기

장롱면허로 살다, 갑자기 면허를 바꾸게 된 이유

by 혀니버니

나는 2021년 여름에 런던에 와서 벌써 4년째 살고 있다. 한국에서도 장롱면허였고, 여기서도 굳이 쓸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런던에서는 차가 지하철보다 빠르지 않다. 구글맵을 켜 보면 이렇게 나온다.


지하철: 20분

자동차: 25분 (???)


런던에서는 이게 일상이다. 그러니 차를 굳이 탈 이유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운전면허증도 장롱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런데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영국 거주 5년이 지나면, 한국 면허를 영국 면허로 교환할 수 없고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


‘어? 그럼 나 지금 4년 차인데, 내년에 5년 되면 아예 못 바꾸는 거네?’


그 순간 머리가 번쩍했다. 게다가 요즘은 BRP 실물카드가 없어지고 eVISA만 남아서, 영국에서 쓸 수 있는 사진 있는 신분증이 하나쯤 있으면 생활이 훨씬 편하다. 두 가지 이유가 겹쳐서 결국 부랴부랴 신청하게 됐다.


“4일 프로젝트”


제목에 쓴 “4일”은 실제 처리 기간이 아니라, 내가 들인 과정의 총합이다.


대사관 가서 공증 신청 (1일)

작성 서류 챙기기 (1일)

공증 수령 (1일)

최종 서류 정리해서 우체국 제출 (1일)


이렇게 해서 꼬박 4일이 걸렸다.

HSBC에서 계좌 트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제출 서류와 체크리스트

출처: DVLA

운전면허 교환을 위해 필요한 건 단순하다.

D1 신청서 (우체국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음)

eVISA Share Code (BRP 대신)

한국 운전면허증 원본

운전면허 번역·공증본 (대사관 발급)

증명사진

수수료 £43 (Postal Order나 은행 수표로만 가능)


여기까지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한국처럼 온라인 원스톱 서비스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DVLA는 온라인 신청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걸 종이서류와 우편으로만 받아준다.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영국 행정은 여전히 아날로그 감성이 짙다.


공증 – 단 한 번만 발급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대사관에서 운전면허 번역 공증을 받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딱 한 번만 발급해 준다는 것. 잃어버리면 다시는 발급받을 수 없고, 영국 면허 시험을 처음부터 쳐야 한다.


나는 실제로 이걸 이사하다가 잠시 잃어버려서 정말 멘붕이 왔었다. ‘아, 이제 시험 봐야 하나 보다…’ 하고 좌절했는데, 몇 달 뒤 이삿짐 속에서 어이없이 다시 찾았다. 허탈하면서도 살았다 싶었던 순간이었다.


사진 – 현실적인 영국 퀄리티


영국 전역에는 Photo-Me라는 부스가 있다.

한국처럼 사진관에서 보정까지 싹 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가장 가까운 부스를 찾아서 찍는 게 속 편하다. 나는 회사 앞 Farringdon 우체국 옆에서 찍었다.


결과물은… 마치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처럼 나왔다.

영국 증명사진은 늘 그렇다. 그냥 규격만 맞으면 된다며 현실만 보여주는 스타일.


영국식 아날로그 결제


DVLA의 또 하나 독특한 점은, 현금/카드 결제를 아예 안 받는다는 것이다.

21세기가 맞나 싶을 정도다. 오직 Postal Order(우체국 발급 수표)나 은행 수표만 가능하다.


나는 회사 점심시간에 부랴부랴 우체국에 갔는데, 현금을 뽑아와서 Postal Order를 발급받아야 했다. 인생 처음 써보는 수표라 좀 신기하기도 했고, 직원분 도움 없었으면 못 했을 거다.

Postal Order Number 작성도 직원 도움을 받았다...숫자가 왜저렇게 생겼담

작은 해프닝들


우체국 봉투에 주소를 어떻게 써야 할지 한참 헷갈렸다. 한국인 블로그 후기를 몇 개 읽었는데, 다들 이상하게 From(보낸 사람) 란에 DVLA 주소를 쓰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 처음 잘못 올린 게 그대로 퍼진 것 같았다. 괜히 나도 헷갈려서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당연히 To에 쓰지 왜 From에 쓰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순간 꽤 민망했다.


사진을 붙이려는데 우체국엔 가위가 없었다. 난감해하는데 옆에 있던 영국 분이 자기 가위를 빌려주셨다. 이런 게 또 영국식 소소한 친절이다.


결과와 소감


서류를 모두 제출하고 나면, 별도의 연락은 없다. 기다리다 DVLA 사이트에서 확인해보니 이미 발급이 완료되어 있었다. 그날 바로 집으로 면허증이 도착했을 때의 안도감이란…

내 한국 면허는 2026년 만료인데, 영국에서 받은 건 10년짜리였다. 무엇보다 BRP 실물카드가 사라진 지금, 공식 사진 신분증이 있다는 게 생활에서 꽤 쓸모 있다.


“HSBC 계좌 트는 것보다 쉽다”는 게 최종 소감이다.


영국 생활을 오래 할수록, 한국과 다른 행정 문화에 놀라고, 또 거기에 적응해간다. 이번 면허 교환 과정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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