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아서

그 여자는 화가 난다*

by 현정

여자는 하루에 네 번씩 전화를 걸어오는 남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침, 점심, 저녁, 자기 전 섭취하는 영양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남자의 전화를 받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전화를 끊을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다. 사랑에는 응당 사랑으로 호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여자는 알지 못한다.

여자는 목소리를 들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고마워 공주님이라는 문자를 보낸 남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원치 않는 사랑을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무엇을 팔고 있는지 고민한다. 아마도 여자라는 존재 자체일 테다. 여자는 하루에 네 번씩 끈적한 무언가가 여자의 몸을 타고 흐르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여자는 그걸 수치심이라 이름 짓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사랑한다를 폭력으로 정의한다.

여자는 남자의 기쁨조가 된 것만 같아 화가 난다.

여자는 남자에게 점령당한 최근 통화 목록에 화가 난다.

여자는 남자와의 통화를 “하루 일과와 애정 표현”으로 요약하는 에이닷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남자가 여자의 아빠라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모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부모의 사랑한다는 말에 나 역시 그렇다고 응할 수 없는 자식은 죄책감을 느껴야만 한다. 그가 나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아들에게는 전화하지 않는 남자에게 화가 난다. 남자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은 남자의 전화번호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남자와 대화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하루에 네 번씩 아들의 안부를 묻는 남자에게 화가 난다.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면서도 여자에게는 사과하지 않는 남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남자를 차단한 아들에게 화가 난다. 부모가 아무리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식으로서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여자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를 차단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사실 여자도 아들처럼 남자를 내팽개치고 싶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를 감당해야 함에 화가 난다. 남자는 몇 개월 전 뇌경색을 앓았다. 뇌의 일부를 잃어버린 남자는 하루에 네 번씩 여자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남자는 시간이 많다. 시간을 죽이려 자꾸만 과거를 떠올린다. 과거에는 살림살이를 내던지는 남자가 있다. 술에 취한 채 아내를 향해 벽돌을 휘두르는 남자가 있다. 술에 취한 아내에게 살이 찢긴 남자가 있다. 휘두르고 찢김과 동시에 아내와 몸을 섞는 남자가 있다. 그 옆에는 이불을 뒤집어쓴 남매가 있다. 깨진 소주병들과 핏빛 발자국이 있다. 남자는 울며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아무래도 뇌에 다시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과거의 일이 갑자기 선명히 떠오른다며 운다.

여자는 우는 남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를 지배하는 장면이 남자에게는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라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그것을 아동학대라고 부른다.

여자는 남자가 스스로를 아동학대 가해자로 정의하지 않음에 화가 난다. 그럼에도 남자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아동학대의 가해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아동학대의 피해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우는 남자를 달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과거보다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런데도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사랑하는 것이든 미워하는 것이든 둘 중 하나를 고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사랑과 미움이 사실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전화에 무성의하게 응답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어차피 계속 받아야 할 전화라면 조금이라도 덜 아픈 방식을 택하고 싶다. 그런데

상처 주고 싶다.

되갚아주고 싶다.

여자는 삼십대 중반이 되어서도 아동학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래서

여자는 화가 난다.



* 『그 여자는 화가 난다 (국가 간 입양에 관한 고백)』(마야 리 랑그바드, 난다, 2022)를 읽고, 형식을 모방하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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