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by 현정
KakaoTalk_20210622_230949535.jpg #김진영 #아침의피아노 #한겨레출판
아침의 피아노. 베란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피아노에 응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틀렸다. 피아노는 사랑이다. 피아노에게 응답해야 하는 것. 그것도 사랑뿐이다. -《아침의 피아노》p.11


엄마를 떠나보내고 한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때 이 책을 읽었다. 죽은 사람 말고 멀뚱히 남겨진 나를 보살피기 바쁘던 때였다. 한걸음 더 솔직하자면 엄마가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죽었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야만 내 죄책감이 덜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이의 마음으로부터 나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걸 이 책을 읽는 나를 보곤 깨달았다.


저자는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책의 머리말에는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들을 쓰셨다”라고 적혀있다. 덕분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가혹하지만, 그럼에도 덕분에, 이 책은 인생의 종착지를 눈 앞에 둔 삶의 가장 솔직한 기록이 되었다.


위에 적어둔 책의 첫 번째 글, 아침의 피아노는 유달리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글이었다. 매일 같이 듣던 아침의 피아노지만 불과 하루 사이 저자에게 들린 피아노 소리는 어쩐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엄마에게 아침의 피아노는 무엇이었을까.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가 힘들다. 그 말들이 나이건만, 그 말들이 없으면 나도 없건만.
나는 말해야 한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 같은 책, p.166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아마 ‘사랑’ 일 것이다. 저자는 살아가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물을 사랑이라 생각하고 그에 응답하는 것도 사랑뿐이라 여긴다. 그래서 이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때, 그래서 오히려 더 머릿속이 엉망진창일 때. 나는 그럴 때 글을 쏟아내는 것 같다. 브런치를 한동안 죽음으로 가득 채우던 때가 그랬다. 어제 쓴 글과 오늘 쓴 글이 정반대의 소리를 쏟아내더라도 그냥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도 비슷한 솔직함이 느껴졌다. 일기처럼 두서없이 날짜 순으로 늘어놓은 책처럼 보이지만 읽다 보면 어느덧 저자의 삶에 스며든다. 저자가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알겠다. 얼마나 더 사랑하고 싶었는지도.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책의 표지에 카피로 쓰여있는 문구다. 그렇다면 슬픔은 어떨 때 쓰는 것일까. 예전에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생각하기에 슬픔은, 다른 감정의 끝에 남는 흐린 흉터 같았다.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하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불쌍하고 안타깝고 짠하고 감동스럽고 공감되고 공허하고 허무하고, 이런 것들의 잔상. 그게 슬픔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수많은 감정 중 그나마 슬픔과 가장 가까운 상태를 꼽으라면 나는 ‘무기력’을 꼽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한 이유를 알겠다. 저자는 무기력하지 않았다. 책의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글은 점점 짧아지고 이에 비례해 흰 여백은 점점 커다래지지만, 그럼에도 “임종 3일 전”까지 글을 썼다는 저자의 숨결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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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공로
돌아보면 살아온 일들이 꿈만 같아서 모두가 고맙다. 나는 평생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았지 나 자신의 능력과 수고로 살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안다.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면 그건 모두가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이별의 행복, 그건 빈손의 행복이 아닌가. - 같은 책, p.178


이별의 행복,

이 책의 부제는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다. 누가 제목을 붙였는지 알 수 없으나, 저자는 본인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만 애도하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책 한 권을 가득 채울 만큼 내가 충분히 애도하고 떠날 테니 남아있는 그대들까지 슬퍼할 필요 없다고. 이별과 행복이라는 단어를 굳이 연결해 말하고자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와 같이 죽어가는 이들과 스스로에 대한 진짜 애도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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