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이’는 초보를 뜻하는 신조어로 사용되고 있으나,
이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차별의 언어이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4일, 세이브더칠드런에서 발표한 논평이다. 심심찮게 ‘주린이, 헬린이, 요린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해왔기에 이 논평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름 차별의 언어에 민감하다고 생각하는 나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린이’는 정말 차별의 언어일까? 어린이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내가 차별의 뜻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더라도 듣는 사람이 모욕적으로 느낀다면 그건 차별이 맞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생각이 중요했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어린이가 없었고, “○린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물어봐줘”라고 부탁할 만한 어른도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여기엔 무언가 답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 《어린이라는 세계》 p.32
생각해 보면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시도 때도 없이 위계적이다. 그것이 그들의 안전 혹은 미래를 위해서 일지라도 말이다. 하지 말라고 말하고, 하지 않으면 착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모든 ‘안 돼’가 정말 어린이를 위해서일까? 대개는 어른을 위해서가 아닐까?
나는 착한 어린이가 걱정스럽다. 내가 지나치게 착한 어린이였기에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모든 착한 어린이가 나와 같지는 않을 테지만, 나는 결핍으로 만들어진 착한 어린이였다.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칭찬이 고팠고 그래서 거역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어린이였던 내가 너무 큰 짐을 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어린이는 미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능숙했다. 어떻게 해야 착한 어린이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항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 p.197
뼈를 맞았다. 작다고 0.5명인 것은 아니다. 작다고 모자란 것도, 불완전한 것도 아니다. 어린이도 엄연히 사회의 구성원이고 하나의 인격체다. 다만 처음이라는 장애물에 맞닥뜨릴 일이 많아 어른에 비해 조금 더 미숙해 보일 뿐이다.
어린이의 미숙함은 종종 답답하지만 보통은 귀엽고 대견스럽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오지랖을 작은 몸으로 막아가며 온갖 처음에 맞서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처음이 두렵고 내 미숙함을 내보이는 게 수치스럽다. 아마도 이런 마음 때문에 초보를 빗대어 ‘○린이’라 칭하는 것일 테다. 어설프지만 나의 도전을 귀엽고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달라고. 간혹 답답할 때도 있겠지만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고.
올해로 어린이날이 99주년을 맞는다. 아동을 어른과 같은 독립적인 존재로서 그 존엄성을 존중하는 말로 방정환 선생이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아해놈’, ‘애녀석’처럼 아동을 낮춰 부르는 말이 성행했던 시대에 맞선 자유와 해방의 언어였다. (…)
‘○린이’는 아동을 대상화하는 언어이며 그것의 사용은 사회적 약자인 아동의 언어를 빼앗는 차별 행위이다. 온전히 환대 받아야 할 아동의 자리를 아동의 동의 없이 어른들이 빌려 자신을 배려해 달라는 데 사용하고 있다. (…) 한 세기 전 아동의 자리를 찾기 위해 사용되었던 ‘어린이’라는 말은 어른들에 의해 왜곡되고 심하게는 아동을 모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어른들의 질서로 가득한 세계에서 왜 어른들은 많지도 않은 아동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가?
세이브더칠드런의 논평을 발췌한 내용이다. 주장을 하기 위함이겠지만 다소 강한 어조로 쓰인 논평은 약간의 거부감마저 들게 한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인정한다. 나는 어린이의 자리를 빼앗아 나의 미숙함을 배려받고자 했다. 1인분의 몫을 해내려 애쓰는 어린이 앞에서 덩치만 큰 0.5명이 되어버렸다. 불완전한 것은 어린이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그냥 초보가 되려 한다. ‘○린이가 차별적 언어라는 주장은 다소 지나치다’라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어린이라는 세계》의 김소영 작가가 말하듯,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