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교환 독서 : 마쓰이에 마사시 <가라앉는 프랜시스>
제목에서 ‘가라앉는’이라는 표현에 마음이 머뭅니다. 이 소설을 읽은 직후 저의 마음에 툭, 책상 아래로 굴러 떨어진 연필이 뾰족한 심으로 바닥에 작은 점을 찍듯 그렇게 툭, 점 하나를 남겼네요. 저의 눈앞에서 그것이, 그것들이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라앉는 그것은 무엇이려나.
우편물을 배달하러 온 게이코에게 미노리카 씨가 이야기하지요. “당신이 우편배달을 담당하고 나서 여러 가지로 좋은 일이 있”었다고. 그 말에 게이코가 놀라며 묻습니다. “그러세요?” 전혀 뜻밖이라는 듯. 곧이어 미노리카 씨가 말합니다. “저녁노을”이라고요. 몇 달 전 배달온 게이코에게 미노리카 씨가 물었다고 해요. 오늘 날씨가 좋은 것 같은데 하늘은 어떤 상태냐고.
책에서 눈을 떼고 잠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벽을 바라봤지요. 누군가 나에게 하늘의 상태를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 여기서 미노리카 씨는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하늘을, 방금 내가 본 하늘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게이코가 대답했어요. “날은 맑고 하늘은 파랗지만 벌써 저녁노을이 시작되었어요. 오늘 구름은 참 이상해요.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순면 이불을 쭉 세로로 깔아놓은 것처럼 전혀 끊기지 않고 떠 있어요. 맞아요. 떠 있다기보다 깔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게이코의 말로 미노리카 씨는 눈이 안 보이기 전 초등학생 때 마지막으로 본 노을 진 하늘을 명징하게 떠올립니다. 이후 미노리카 씨가 이야기합니다. “눈이 보이면 어떤 모습일까,라고 지금도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초등학생 때 내가 본 구름은 죽을 때까지 내 안에 남아 있어요.”
저는 이 장면이 이 책에서 가장 좋았습니다. 프랜시스가 가라앉는다는 표현이 곧 ‘사라진 것은 형태를 잃음으로써 언제까지고 남’ 는다는 미노리카 씨의 말과 딱 맞아떨어진 거지요. 안치나이라는 마을을 글로 산책하며 느끼기를, 결국 언젠가 물에 잠겨 사라질 그 모습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더 선명해지고, 짙어져 언제까지고 기억될 것이라는 걸 책을 다 읽고 나서 깨달을 수 있었어요.
딸아이와 일주일에 한 번, 함께 북클럽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죠? 얼마 전 함께 읽은 그림책 바버라 쿠니의 <강물이 흘러가도록>이라는 책에서도 강물이 나옵니다. 돌아가신 엄마와의 추억이 덕지덕지 남겨진 집이, 마을이 댐건설로 인해 모두 물에 잠기지요.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와 아빠는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그 강 위를 떠나닙니다. 아이가 강물에 손을 담그는 장면에서 뭔가 마음이 일렁이더라고요. 그 시절에, 기억에, 추억에 손을 담근다는 것. 이미 모든 것이 다 사라졌지만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은 그 경계에서 수면 위와 아래에 존재하는 ‘영원’ 같은 것들이 뱃머리에 찰박이는 강물소리처럼 제 마음 안에서 일렁였습니다.
모든 시선엔 이름표가 달려 있(43p)다고 합니다. 또 몇 천년, 몇 만년 전에도 존재했을 별은 그 나름의 음이 있(189p)다고 하고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들이 사실 저마다의 이유와 소리로 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아, 너무 벅찹니다. 그 많은 것이, 지나온 시간의 궤적이 이름표와 음을 가지고 나를 구성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그 위에 지금이 있는 거지. 지금이라는 것은 경험과 기억 위에 위태위태하게 올라 있는 것이니까. 138p
밤비님과 제가 지나온, 겪었던 모든 일들 위에 지금의 우리가 있습니다. 제 아무리 거센 물살이었다 해도 그것에 잠겨진 건 모두 ‘어제’ 일뿐이지요. 그런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뜨거운 연애소설을 읽었는데도 저는 그 사무친 떨림보다 누군가의 우연한 한 마디에 꽂혀 소설을 조금 엉뚱하게 풀어내 보았습니다. 비님과 함께 서 있는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찰박 일 물결을, 물살을 오롯이 느끼며 언제까지고 남을 이미 사라진 것들을 추억하고 또 기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