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에 관하여

우연한 선물

by 책사이애

작년 1월, 제주에서 한 달을 살았다. 돌담이 낮게 둘러진 단층 주택이었다. 세련된 오피스텔 형 숙소나 펜션형 숙소가 오히려 가격이 저렴했지만 부러 오래된 집을 골랐다. 마당이 있어 제주 바람이 수시로 들어차는 귀덕집에서 아이와 꼬박 28일을 살았다.


태어난 이후 여태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딸아이는 주택 특유의 많은 창문과 벽장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벽장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창문 앞에 신발을 갖다 놓고 들락날락 거리며, 한 낮이면 겨울이 무색할 만큼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과 노닐었다.


300만 원가량의 숙소 임대료와 30만 원 가까이 되는 공과금이면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한 달 월급으로 300만 원을 받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한 달 내내 뼈 빠지게 일해 번 비용보다 많은 비용을 내놓다 보니 선택한 모든 것들이 나름대로 최선이길 바랐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생각만큼 최선이지 못했다. 사나흘 간격으로 하나 둘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손흥민이 출전하는 축구 시합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고, 하루는 티브이 수신이 갑자기 끊기기도 했다. 곧바로 해결되지 않는 건 제주나 여기나 마찬가지. 주인과 기사님을 번갈아 통화하고 수리 신청을 하며 불편을 겪었다. 하루는 일어나 화장실로 가는데 문 앞에 시뻘건 물이 쏟긴 것처럼 낭자해 정말이지 끔쩍 놀랐는데 알고보니 문틈 새로 비가 차 녹물이 흘러내렸던 거다. 이후 문 앞은 계속해서 떨어지는 녹물에 벽지까지 불그레 핏물처럼 얼룩졌고, 수리하시는 분이 오셨지만 내가 돌아간 후 공사를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추운 바깥 날씨와 따뜻한 실내 온도 때문에 한 달 내내 창문에 결로가 일었고, 얇은 커튼으로는 제주 바람을 온전하게 방어하지 못해 창문 옆에 붙어 있는 침대에서 잠을 못 자고 바닥에 요를 깔아 놓고 아이와 껴안고 잤다. (정말 추웠다!)


300이나 줬는데, 이렇게 덜덜 떨면서 잘 일이야? 티브이도 제대로 안 나오고 망망대해에서 정전까지? 저 뻘건 핏물은 언제까지 쏟아지는 거야?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나의 제주살이는 딱 그렇게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신기한 것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 제일 처음 계약서를 작성할 때 숙소 예약이 아닌 임대 계약으로 진행된 시점부터 나의 마음 가짐이 달랐던 것이다. 숙소가 아닌 나의 집을 빌린 것이고, 한 달 동안 어엿한 제주도민으로 살 것이다!


그 마음이 모든 불편을 감수함은 물론, 모든 상황이 ‘제주살이’ 그 자체로 다가와 즐겁기까지 했다. 어딘가에 짐을 내리고 살더라도 능히 있을 수 있는 일. 여행객이 아니라 현지인이기에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닌 일상을 살아내는 존재로 제주 안에 머물렀다. 그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져 어떠한 불편도 그날의 에피소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여행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하다고 해서 줄을 서서 기다려 겨우 테이블에 앉았는데 서비스가 형편없다. 서비스가 형편없는 건 주인의 부족한 경영 마인드이고 그것을 경험으로 획득했기 때문에 좋은 식당과 아닌 식당을 더 잘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아무런 기대 없이 들른 카페에서 말도 안 되게 맛있는 커피를 먹게 되면 내가 이 카페를 잘 골라서 얻은 기쁨이 아니라 일상에서 우연히 얻게 된 감사한 선물처럼 느껴진다.


삶이 그런 것 같다. 내가 내준 것만 생각하며 최선만을 고집하면 얻을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이 적다. 준 것을 준 것이 아닌 나눈 것으로 소화시키며 오고 가는 많은 에피소드를 삶의 재미와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살아가는 일이 전연 다르게 다가온다.


모든 게 다 좋기만 하다면 삶은 작은 고난과 고비도 크게 다가온다. 이따금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배우는 게 더 많다는 걸 여행을 통해 배우게 된다. 우리 삶이 여행이라면 늘 좋은 여행이 아닌 재미있는 여행을, 기억에 남는 여행을 하는 것에 더 의미를 두었으면 한다. 가장 싸게 샀다고 좋아하기보다 조금 비싸게 줬더라도 그 가격 차이만큼의 에피소드가 생길 것이라면 긍정적인 믿음, 가장 좋은 곳이라고 뿌듯해하기보다 조금 후지고 불편한 곳이어도 그 속에서 중요한 걸 깨닫게 될 것이라는 무모한 믿음. 오히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더 필요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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