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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로

액자 속 우리는

두번째 교환독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by 옥대장

여섯 번째 편지


꿈속에서 아이를 잃습니다. 아이는 늘 저를 부릅니다. “엄마!” 그건 마치 비명 같기도, 절규 같기도, 또 고백 같기도 합니다. 그때 그 단어는 저를 부르거나, 찾기 위함이 아닌 어떤... 마지막 인사 같기도 합니다.

두 줄의 문장에도 이리 마음이 꺼끌 거리는 데 꿈속에서 마주치는 아이의 눈빛은 늘 감당하기 벅찬, 아니 감당하기 싫은 또 감당하지 못할 거대한 참극입니다.

누군가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 사랑하는 존재를 잃기도 하지요. 잃었다는 말이 적확한 건 내가 놓은 것도, 버린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시 매 때, 자신도 모르는 새 소중한 것들을 하나 둘 잃어갑니다.

그들 앞에서 나의 꿈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나. 한참을 주무릅니다. 비틀어도 보고, 꼬집어도 보고, 그리고 살포시 눌러도 보고, 온 힘으로 잡아 뜯어도 봅니다. 꿈이니까. 꿈일 뿐이니까. 꿈이기에 더 잔인하다는 걸 아마도, 그들은 모르는 것일 테지요.

매일 아침 다시 살아 돌아옵니다. 팔딱이는 심장과 발그레 진 두 볼은 언제나처럼 다시 벌떡 일어나 나의 품에 안깁니다. 그럼 저는 안도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그러다 다시 밤이 찾아오면 같은 꿈을 꿉니다. “엄마!” 아이의 고백과도 같은 인사가 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가면 저는 또 온 힘으로 잡아 뜯지요. 저를, 꿈을, 시간을.

안도, 했을까요 저는? 꿈이라서 죽지 않았다고 마음을 놓았으려나요? 매일같이 아이가 죽고, 또 살아납니다. 그 고공행진 속에서 아이는 정말 괜찮은 걸까요? 그걸 바라보는 저는, 삶을 있는 그것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편지들은 밤비님과 저에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이 꼭 죽음이기만 한 건 아닐 테지요. 죽음은 죽음으로 남겨두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오스카처럼, 살아갈 이유를 찾아 나서야만 하는 거지요. 네, 그런 겁니다.

기억만으로 무슨 힘이 있나, 늘 회의적이었습니다. 내 곁에 없는데 그를 그리워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데 최근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 덕분인데요.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고, 산 자도 죽은 자를 도울 수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그런 멋진 말을 하는 분이 계셔서 생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을 만큼 엄청난 말입니다.

어떤 죽음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기억이겠구나. 멈춰진 순간 속에 사진처럼 찰칵! 그 장면 속에서 아이와 제가, 밤비님과 할아버지가 계속 살아가는 겁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꼭 시간의 영속성 안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요. 장면 속에 저와 아이는 어쩌면 영원히 남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기억의 형태로 저에게 날아든다면 저는 기꺼이 기억하기로 합니다.

성가시고, 소란스러운 삶 속에서 저는 모든 장면 속에 아이를 걸어 두기로 합니다. 언제고 제가 고백 같은 외침으로 “지아야!” 하고 불러 보는 날이 오게 되면 아이의 아슬아슬한 삶 속에도 제가 걸려 있길 바랍니다.

밤비님의 삶에 걸린 액자를 하나씩 감상해 보겠습니다. 긴 갤러리 통로를 지나면 그 마지막에 걸린 밤비님의 장면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그 기억이 언젠가의 밤비와 저를 도울 것이라는 믿음을 오늘부터 가져 보기로 합니다.

긴 편지와, 긴 눈물, 그리고 긴 우리들의 숨들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라며. 같은 마음으로 밤비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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