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교환독서 -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밤비님에게
책은 진즉에 받았는데 답장이 늦었습니다. 가벼운 소설이겠거니 표지나 제목에 조금 안일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두 번으로 나누어 완독했고, 읽는 동안 어떤 감정선을 따라가기 보다 전체적인 장면을 떠올리며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은 직후 든 생각은 이 책이 한편의 시나리오 같았다는. 그래서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제가 끄적인 문구와 표시해둔 문장들을 한 번 더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기록한 글이 23p 페이지에 있는데요. 네, 처음부터 저는 이 책이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는 시나리오라고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픈 마음과 비틀린 마음들이 떠오른다는 밤비님의 말씀에 저는 그런 지점들을 어떻게 소화했나 골몰해졌습니다. 애초에 이 책은 시나리오, 즉 누군가 연기를 하기 위한 대본 글에 지나지 않았으니 저에게 주인공들의 아픔과 상처는 크게 다가오지 못했던 것도 같아요. 다만, 우리 모두가 어쩌면 각각의 삶을 연기하는 연기자에 지나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고부터는 제 삶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어요.
나는 연기를 잘 해냈나? 지금 내가 연기하는 영화는 어떤 장르인가?
저는 요즘 '관계'에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단순한 인간관계라기 보다, 우리가 맺고 끊기는 관계가 어떤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생각들인 거지요. 얼마 전 읽은 책에서는 '낳음'을 '당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연유가 그저 '당한 일'이 되어버리니 또 거기서 질문이 꼬꼬무 이어지더라고요. 내가 밤비님과 이런 편지를 주고받는 일 또한 어쩌면 '당한 일'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우리에게 배역이 주어진 거지요. 지금 우리는 이렇게 연기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 연기를 진실이냐 거짓이냐로 따져 묻는 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 영화가, 훗날의 우리에게 어떤 '과거'로 남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책은 각 챕터별 소제목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고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좀 더 촘촘해지는 관계가 있고, 반대로 헐거워지는 관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가 나에게 중요하냐 아니냐로 판단될 수 없는 지점이고요. 제가 아무리 상대를 중요하게 생각해도 상대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고 또 그 시간은 추억이 될 수 없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살아냄을 '당하는' 삶일지도 모르겠네요.
오래전 그림책을 읽고 끄적였던 문구가 있어요. 지금 이 책으로 한 번 더 제 안에 각인되네요.
작고 약한 것들은 무르고 여려서 잘 스며들고 잘 벌어진다. 그래서 그 틈은 아주 작은 힘 만으로도 망가뜨리기가 쉽고 망가진 것들은 함부로 다루기가 용이해진다. - 곱슬도치 아저씨의 달콤한 친절 서평 중에서
약한 것들의 시간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지만 그렇기에 완벽한 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연약하고 무른 것들의 시간이 제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단단해지지 않는 것, 오히려 그러해서 더욱이 진짜와 진실인 삶을 이야기하는 인상적인 소설이었습니다. 덕분에 설레는 독서였고요.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재미가 무척이나 달큼한 시간이었습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