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부탁해
“와, 북엇국을 육수로 쓴다고? 신선한데?” 식구들이 거실에 모이면 자연스럽게 티브이가 켜진다. 최근 아이와 남편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은 ‘요리경연' 프로그램이다. 그중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냉장고를 부탁해’다. 패널은 쯔양이다. 먹방 유튜버로 가장 많은 구독자 수를 보유한 프로 먹방러다. 셰프들의 요리도 궁금하지만 사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다. 수백만 원을 배달 음식비로 지출하고, 냉면 육수를 음료수처럼 마시는 그녀의 냉장고, 거기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냉장고 옆 선반에 나란하게 줄지어선 레토르트 북엇국이었다. 북엇국이 많이 쌓여 있으니 진행자가 묻는다. “북엇국을 즐겨 드시나 보네요?” 뭔들, 안 즐겨 먹겠냐마는 그녀의 대답이 놀라웠다. “북엇국을 너무 좋아해서 모든 음식에 육수로 쓰고 있어요,” 비비o에서 나오는 사골육수를 육수로 쓴 것도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그녀의 팁은 놀라웠다. 멸치육수를 대신해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 유레카!
“아이디어 좋다! 오빠도 북엇국 좋아하잖아. 냉동실 어디에 있을 텐데. 마른 북엇살이. 언젠가 어머님이 챙겨 주신 것 같은데 한번 찾아봐야겠어,”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의 소울푸드는 북엇국이다. 결혼해서 처음 북엇국을 끓여줬을 때 울먹이듯 고마움을 표한 적이 있을 정도로 남편에게 북엇국은 특별한 음식이다. 딸아이가 잘 안 먹는다는 이유로 언젠가부터 식탁에서 싹 사라졌지만 마음 한편엔 늘 냉동실 북엇살이 제 부피를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고 꼼짝없이 자리해 있었다.
이참에 붓엇국이나 한번 끓일까 싶어 다음 날 냉동고 문을 열었다. 양쪽으로 총 6칸의 냉동고는 이미 만칸이다. 큼직한 지퍼백에 담긴 북어살을 찾는 게 쉽지 않을 만큼 갖가지 음식과 재료가 여기저기 가득 들어차 있다. 입구 쪽 재료들을 하나 둘 꺼내다가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기왕 꺼낸 거 정리나 한번 하지 뭐.’ 띠링 띠링 냉장고 문이 안 닫혔을 때 나는 경고음이 이러다 고장 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오랫동안 울렸다. 어느 정도 정리가 다 되고 냉동고 문을 닫았다. 뒤를 돌아보니 딱딱하게 언 식재료들이 산더미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제삿날 아이 먹이라며 숙모님이 싸주신 곶감 뭉치에, 언제고 다시 데워 먹을 거라고 찬통에 넣어둔 호빵들, 고긴지 빵인지도 가늠이 안 가는 오래된 돼지고기 덩어리와 유통기한이 2년 가까이 지난 냉동 음식들. 지퍼백 크기가 제각각인 떡 들이며 쓸데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무작정 쑤셔 넣었던 얼음팩들, 그리고 먹을 수 있기는 한 건가 싶게 덩어리째로 얼려버린 이름 모를 육수들. 이것들을 먹겠다고 넣어둔 건지, 버리기 귀찮아 처박아 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가장 신선하고, 깨끗해야 할 냉장고가 사실 가장 오래되고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닐까? 버리기를 유예시킨 게으름을, 당장은 먹고 싶지 않지만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욕심들을, 먹을 만큼만 음식을 소비하지 못하는 우매함을 덩어리째 꽁꽁 얼려 두꺼운 문으로 가려놓고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남편에게 끓여주려 했던 북어살을 꺼내 소분해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 넣었다. 무심하게 처박아 두었던 재료들도 소분해 다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한 번 더 문을 열어 확인한다. 투명한 칸의 입구 속에 든 재료가 한눈에 쉽게 들어온다. 정리된 재료들을 이번 겨울에는 조금씩 꺼내 소진하기로 마음먹는다. 언제고 나의 냉장고를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셰프의 손끝에서 멋진 음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냉장고이길 바라본다.
글로채움 27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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