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못한 편지

늦은 인사

by 책사이애

나쁜 년,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나한테!


네가 사라지고 한동안 너의 집 앞을 서성였어. 붉은 벽돌 벽을 발로 툭툭 차면서 말이야. 은빛 창살 대문을 괜스레 밀어도 보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 초인종도 눌러보고. 조잡한 기계음으로 들리던 ‘즐거운 나의 집’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몰라.


우리가 나눈 시간이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렸어. 너는 아무런 말 없이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졌어. 담임 선생님 말로는 ‘스리랑카’라는 이름도 생소한 나라로 급작스레 이민을 갔다고 했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어. 어제까지 나랑 놀았는데 무슨 이민이야! 그게 말이 돼? 그저, 어디가 아픈가 보다, 아니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집에 갔나 보다 그냥 그렇게 넘겨버렸는데 곧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 더 이상 너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이층 벽돌집, 너희 집에서 우리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잖아. 학교 마치면 마치 당연하다는 듯 너희 집으로 향했고, 너희 부모님이 차려 놓은 밥상에 뽀얀 밥을 퍼와서 찌개에 삭삭 비벼 먹으며 배를 그득 채웠지. 너에게 배운, 지금까지도 고마운 습관은 바로 숙제하기! 너는 꽤 교육을 잘 받은 친구였어. 그때는 그것도 몰랐지만 말이야. 무조건 숙제부터 하고 놀기!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후딱 해치웠어. 숙제도 놀이처럼 할 수 있었던 건 모든 게 서툰 나에게 언제나 다정한 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아주 굵은 연필로 글자를 썼어 너는. 그게 34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기억이 나. 그 글자들의 굵기만큼 내 기억 속에도 네가 굵고 진하게 남았단다.


함께 만화책도 보고 비밀 편지도 쓰고, 또 마을 공터로 가 소꿉놀이도 하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공허하고 조금 쓸쓸했던 그 맘 때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무척 충만했었어. 알지? 너는 알 거야. 그 순간들 속에 내 얼굴이 그걸 다 말해주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 네가 하루아침에 펑!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때 너희 집 앞에서 울던 내가 34년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되었어. 이제는 잊을 법도 한데 ‘편지’를 써야겠다 마음먹으니 곧바로 네가 생각나더라. 사실 나 많이 힘들었거든. 너에게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라도 늦은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보려 해. 아직 말도 안 했는데 목구멍이 딱딱해진다. 은희야. 언젠가의 나를 살린 내 친구 은희야. 잘 지내지? 나도 잘 지내. 여전히 네가 생각나는 걸 보면 열한 살 그때의 내가 너에게 신세를 참 많이 진 것 같아.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인사도 없이 가버린 널 많이 원망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 모든 사정들을 다 이해해 주지 못해 미안해.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어도 ‘스리랑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먹먹했었어. 네가 있을지도 모를 곳이라 생각하면 어딘진 모르겠지만 그곳이 조금은 편안한 곳이었으면 해서 말이야. 혹시 네가 이 글을 본다면, 그래서 우리가 한번 더 만나게 된다면 그땐 내가 너에게 따뜻한 밥을 퍼주고 싶다. 어린 날, 마음이 늘 허기졌던 나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내주었던 너에게 이제는 내가 지은 따뜻한 밥을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 언제까지나 너를 기억하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거, 꼭 기억해 주길 바라.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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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지 못한 편지 - 좋은 생각 특집 공모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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