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이 위에서의 삶
얼마 전 아이가 질문을 해왔다. “엄마, 엄마는 버킷리스트가 뭐야?” 언제고 그에 관한 글을 썼던 경험이 있어 대답이 명료했다. “엄마는 버킷리스트 없어.” 아이는 마치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는 듯 눈알을 데룩 굴리며 재차 묻는다. “엄마는 진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없어?” 나 또한 뭘 확인사살까지 하냐는 눈빛으로 더욱더 큰 목소리로 대답한다. “ 하고 싶은 거 없어. 엄만 다하고 살아. 내일 죽어도 아쉬울 거 없어.”
십 대만 해도 다이어리 곳곳에 ‘버킷 리스트’라는 문구 아래로 번호를 매겨가며 열심히 썼던 기억도 있다. 실상 이루고픈 간절함 보다 나도 언제고 어른이 되면, 형편이 나아지면, 좋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따위로 연관 지어 멋스럽게 나열한 단순한 욕구에 가까웠다. 그리고 늘 단서가 붙었다. ~되면, ~지면, ~다면… 당장 할 수 없기에 욕구를 이월하며 그것을 일종의 원대한 꿈으로 포장해 놓기도 했다. 그런 꿈 한 둘쯤은 있어야 팍팍한 현실이 그나마 덜 부대꼈던 걸까.
그 시절에는 ‘낭만’이나 ‘청춘’ 같은, 이름마저도 사치 같았던 단어들을 삶으로 가져와 본 적이 없었다. 연애를 하는 것도 외롭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고, 하루라도 더 빨리 늙고 싶어 젊음을 경멸했던 시간들이다. 이런 게 청춘이라면, 젊음이라면 기꺼이 사양할 테니 도로 가져가라며 악다구니를 쓰기도 했다. 나에게 내일과 미래는 언젠가는 다가올 보편적이고도 타당한 무엇이 아니라 기를 쓰고 매달리고, 읍소하고 납작하게 엎드려야만 주어지는 포상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나중에, 다음에 무언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미련스러웠겠는가.
양동이(bucket) 위에 올라서야만 보이는 다른 세상을 나는 매시 매 때 양동이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샘이다. 무언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설라치면 지레 겁을 먹고 하지 말자는 마음이 재빠르게 방어했다. 그렇게 바람이 욕망이 되고, 낭만이 낭패가 되는 삶을 길게 이어오며 깨달은 것이 있다. 무언가를 유예시키는 삶은 부질없다는 것.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최선을 다해 하는 것. 그것이 리스트로 적어가며 내일을 꿈꾸게 하는 헛된 희망보다 더욱더 현실적이고도 당연스럽게 나의 삶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런 마음은 오히려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더욱이 명료하게 비춰주었다. 뭔가를 ‘해야만 한다’, ‘하고 싶다’라는 바람 속에 숨은 게으름과 나태함을 ‘하면 되지’로 바꿈으로써 맞닥뜨린 하루를 더욱이 빛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시 또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 와 아이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버킷 리스트는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어 놓는 핑계 같은 글이야. 죽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은 지금 당장 하면 되고, 가봐야 하는 곳은 지금 당장 가면 돼. 죽음을 저 멀리 유예시킴으로써 오늘은 선물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죽음을 선물로 여기고 오늘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이 엄마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삶이야. 너의 버킷 리스트가 오로라를 보는 것이라면 지금부터 아이슬란드로 떠날 준비를 하면 되는 거야. 그럼 그때부터는 버킷 리스트가 아닌 여행 플랜 리스트가 되는 거지. 죽기 전에 후회할 것을 미리 정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의 리스트를 제대로 써보자!”
위태로운 양동이 위에서 내려와 단단한 땅에 발을 붙이고 서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안전해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살아생전 이루고 싶은 뜨거운 것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 양동이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면 옆으로 나란하게 서서 그의 몸을 잡아주는 일이다.
잇글 '하지 또는 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