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거짓말

잃어버린 80점

by 책사이애


“엄마! 나 백점 받았어!” 교문 앞에서 시험지를 손에 쥔 아이가 부리나케 뛰어온다. 처음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2학년이 된 그날까지 아이는 백점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는 시험이 없다고 했는데, 무슨, 1학년 입학하자마자 받아쓰기 시험을 시작으로 매주 수학 시험이 치러졌다. 단원 평가라 해서 시간 내에 제시된 문제를 풀어내야 하는 전형적인 필기시험이었다. 초등학생 때 놀지 언제 노나,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다. 마냥 놀아야 할 나이에 문제집이니 학원이니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신경을 쓴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아이가 따라가기는 벅찼던가보다.


수학 시험 20문제 모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가만 보자,

...

아무래도 아이의 답이 새로이 써진 것 같다. 지운 흔적이. 또 망설인 흔적이 여실히 보이는 시험지를 받아 들고 잠시 고민한다. 이렇게 기뻐하는 아이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기 싫고, 나 또한 이런 거짓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마음이 복잡해져 일단 시간을 벌어 놓는다. 집으로 들어와서도 한참 식탁에 앉아 고민을 거듭한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눈치를 보며 티브이 앞에 앉아 있던 아이를 불러 식탁에 앉힌다. “이거, 정말 백점 맞아?”

아이는 대답한다. “응” 한 번 더 물어본다. “17번과 19번, 이거 정말 처음 쓴 답이 맞아?”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시험은 채점을 아이들이 스스로 했다고 한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일이 생기려고 한 건지 스스로 채점한 시험지가 첫 백점을 맞았고, 처음 적은 답과 바꿔 쓴 답이 겹쳐 써진 시험지 앞에서 아이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을 거다.

“사실은, 내가... 고쳤어.”


잔뜩 구겨진 내 표정 앞에서 아이의 얼굴도 같이 무너져 내린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헉헉 내쉬다가 이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절망스러웠다. 아이의 울음이 토해져 나오는 동안 나의 절망도 함께 쏟겨졌다. 식탁 위 시험지 앞에서 엄마와 아이는 각자의 슬픔을 한없이 토하고 또 토해냈다.


밤새 한숨 못 자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이 깊었다. 새벽 동이 틀 때 책상에 앉아 선생님께 길고 긴 편지를 썼다. 자유롭게 키우고 싶어 자잘한 잔소리를 삼갔고, 첫 아이에 외동이라 이쁘고 고운 마음에 살뜰히 키운다고 애썼지만 아이는 아직 가르칠 게 많다, 부디 아이에게 호되게 꾸짖어 달라, 이 거짓말로 배울 수 있는 의미 있는 교훈을 꼭 가르쳐 주시길 부탁드린다, 참담한 마음으로 사과드리며, 아이와 저의 사죄를 부디 너그럽게 받아들여 달라. 할 수 있는 말들을 모두 적어 내린 편지를 아이의 손에 들려 학교로 보냈다. 편지를 받아 든 아이는 눈이 퉁퉁 부었고, 한 장의 편지 무게가 지난밤 스스로를 짓눌렀던 시련의 무게만큼 묵직해 보였다.


아이가 등교하고 얼마 안 가 담임선생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또한 길고 긴 메시지로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셨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아이들의 양심은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서서히 젖어드는 것이라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 속에서 알게 모르게 배워가는 것이라고. 우리 어른들도 거짓말을 하고, 매 순간 양심을 갖기 어려운데 자라는 아이들은 충분히 실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금 어머님의 이 가르침이 앞으로의 아이에게 커다란 양분이 될 터이니 걱정은 내려두고 지금처럼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 주면 좋겠다는 메시지였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도 매일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여전히 양심이 뭔지 어른스러움이 뭔지 모르겠는데 그저 아이라는 이유로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었던 건 아닌지, 나는 그리 키우지 않았다는 허상과도 같은 부모역할에 함몰되어 순간이나마 아이를 용납하지 못한 건 아닌지. 어떻게든 언제든 무조건 네 편, 너를 믿겠다던 나는 진짜 아이를 믿은 게 아니라 얄팍한 부모의 당위를 믿은 건 아닌지. 아이는 단 한 번만이라도 백점을 받아보고 싶었노라 고백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백점을 받는데 자신은 한 번도 받지 못해 부러웠노라고. 하면 안 되는 행동인 걸 알았지만 눈 한번 질끈 감으니 괜찮았노라 울음 섞인 목소리로 구슬피 이야기했다. 그런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러면 너도 공부를 똑바로 해라, 남을 속이면 안 된다, 남보다 너 자신을 속인다는 게 더 나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따위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품에 안긴다. 선생님에게 편지를 드리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안아 주셨고, 지금은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한 번 더 이야기한다. “누구보다 네가 힘들었을 거라 생각해. 또 이것으로 네가 배운 것들도 분명히 있을 거고. 엄마는 백점 받은 너보다 80점이어서 노력하는 네가 더 멋지다는 거 알아줬으면 해! 고치지 않았어도 충분히 잘한 점수였어. 20점 때문에 80점을 잃어서 엄만 그게 무척 속상해. 너도 이번 기회에 뭐가 더 아까운 건지, 진짜 너를 위한 게 뭔지 잘 생각해 보길 바라.”


아이가 배운 건 무엇이려나. 아이는 차치하고, 나에게 그 일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부모로서의 나의 자리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유능한 엄마 옷 훌훌 벗어던지고 진짜 아이를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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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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