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또는 발신

그녀의 자리

by 책사이애


두 켤레의 운동화를 의류수거함에 밀어 넣는다. 10년 전에 산 러닝화다. 유행이 지나 더 이상 신지 않는다. 오랫동안 신발장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다가 새 신발을 사면서 별 수 없이 자리를 빼게 된 것이다. 신발장에 옥수수 알갱이처럼 빼곡히 박혀 있는 신발뒤축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스타일에 따라, 용도에 따라 계속해서 사게 되는 신발들이다. 조금만 낡아도 이내 자리를 내줘야 한다.


퇴근길이었다.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입은 옷에 따라 겨울이기도 늦가을이기도 한 그런 날씨였다. 막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가 주홍빛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노을이 짙어지는 시간이었다. 왕복 4차선 오르막 도로를 오르는데 앞선 차들이 비상 깜빡이를 켜며 멈춘다. 푸른색 신호에도 차들이 출발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쭉 내밀어 보지만 보이는 것은 빨간 후미등 불빛뿐이다. 잠시 뒤, 서서히 나아가는 차들 뒤따라 나도 액셀을 밞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박스를 높다랗게 쌓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이 보였다. 순간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니라면 저런 신발을 신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신발이 눈에 들어온 건 그 날씨에 신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여름용 샌들이었기 때문이다.


발등에 야광빛을 내는 브랜드 로고가 보였다. 더 놀라웠던 건 샌들 밖으로 모두 삐져나온 노파의 발가락들이었다. 불거져 나온 발가락은 송충이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아동용 여름 샌들을 신고 도로를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특이했다. 구부러진 발가락이 도로의 차가운 면에 닿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종종걸음 치고 있었다. 그녀의 키보다 높이 쌓인 박스들 때문에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도로라는 사실이 전연 중요하지 않다는 듯 도로를 횡단하는 노파의 삶은 위태로워 보였다.


찰나였지만 노파의 인상은 강렬했다. 집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으며 잠시 서있었다. 눈 아래 어지럽게 늘어져있는 신발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안 가 노파를 다시 보았다. 어떤 옷을 입더라도 혹한으로 느낄법한 완연한 겨울이었다. 마트에서 볼일을 보고 구렁이 뱃속 같은 주차장 커브길을 돌아 나왔다. 번쩍이는 경광등을 지나 도로에 올라선 순간 노파가 보인다.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눈으로 노파를 좇았다. 청록색 패딩을 입고 특유의 종종걸음으로 리어카를 밀고 있다. 카라가 빵빵해 부채처럼 펼쳐져 있는 패딩은 아동용이다. 이내 눈길이 신발에 가 닿았고 순간 웃음이 튀어나왔다. 번데기 모양의 다이나모 운동화였다. 애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사봤을 그 신발, 아동용 신발과 패딩을 입고 있는 노파는 그렇게 아이처럼 잰걸음으로 동네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었다.


초록색 의류 수거함 속에 그득 쌓인 옷과 신발들, 불현듯 노파의 뒷모습이 겹쳐진다.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그녀의 발가락이 따듯한 솜털 속에서 덥혀지기를, 엉덩이까지 푹 덮인 패딩이 그녀의 작은 체구를 부풀려 어두운 밤에도 눈에 잘 띄게 몸피를 불려주기를, 하나 마나 한 말들만 허공 속 허연 입김처럼 풀풀 날리 운다.


잇글 3기 '신발 또는 발신'

금요일 연재
이전 12화내 인생의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