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토리얼

by 승현


도슨트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도슨트에 대한 이미지는 갖고 있었다. 작품 앞을 정장을 차려입은 도슨트가 자리하고 관객을 향해 또박또박 해설을 읊고 그다음 작품으로 이동한다. 항상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며. 무언가 학술적인 느낌이 가득했기 때문에 전시장에 가면 도슨트를 듣기보다 작품 설명을 보고 고뇌를 작품과 단 둘이 하는 편이었다. 작품 해설이나 도슨트 해설이나 어려운 건 똑같으면 차라리 내가 읽다가 혼자 욕도 읊조리고 이 작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신랄하게 마음속에서 비평을 하거나, 아니면 이 작가는 천재야!라고 생각하고서 그 작품 앞에서 그 작가에 대한 것을 검색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나에게 첫 과제가 떨어졌다. 바로 도슨트를 듣고 감상문을 작성하는 것이었고, 가벼운 과제가 하나 더 붙었다. 이번 전시 작품 중 하나를 택하여 스크립트(원고)를 작성하시오. 광주에 상시 운영하고 도슨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ACC(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택지가 좁았다. 혼자 예약하기는 너무 뻘쭘해서 10살 차이가 나는 막내 동생을 꼬셨다. 맛있는 거 사줄게 같이 가자. 다행히도 그땐 사춘기가 덜했기 때문에 그때까진 먹을 것으로 꼬시는 게 가능했던 중학생 동생은 흔쾌히 그러겠다 했다. 예약 인원은 총 두 명, 주말 오전 해설을 예약했다.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동생이랑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일상적인 대화였으나 나는 속으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전시를 그렇게 즐기지 않는 동생인데 지루해하면 어쩌지. 사실 나도 걱정이었다. 수업시간에 그리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으니까. 나의 집중력이 몇 분을 버틸지 알 수가 없었다.



전시장에 도착하고, 문자 메시지를 확인해 집결 장소로 향했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이미지의 -단정한 정장차림의- 도슨트가 우릴 맞이했다. 그 당시 ACC에선 <사유정원>, <좀비주의>,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가 한창이었다. 스릴러 마니아인 나는 좀비주의란 제목이 예약할 때부터 끌렸는데, 도슨트는 처음부터 물었다. 혹시 무슨 전시에 더 관심이 있으세요? 우물쭈물 대며 좀비주의를 이야기하니 그걸 중점적으로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도슨트 소요 시간은 1시간이다. 큰 마음먹고 전시장에 입장했다.



정말 만약에, 내가 유명한 도슨트로 살다 죽게 되어 굉장한 기회로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이 부분은 꼭 넣을 것이다. 바로 좀비 주의 전시장 앞에서 전시 제목을 설명하며 attention zombie라고 자그마하게 써져 있는 영문 앞에서 "여러분 뉴진스의 어텐션 노래 아시죠? 그 어텐션 ~"입니다. 하고 짧은 단발머리를 힘껏 젖히는 도슨트의 모습을 말이다. 내 안의 도슨트에 대한 이미지가 와장창 깨져버린 순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마이너 감성의 작품 앞에서 가감 없이 유명 캐릭터 이름을 읊기도 하고, 전혀 다른 주제의 전시장을 연결 지으며 설명하는 도슨트의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못 알아들은 단어도, 문장도 전혀 없어서 신나게 ACC를 탐험했다.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는 제목을 보면 예측 가능하듯이 비디오 수집가가 흔쾌히 전시로 내어준 수 백개의 비디오들이 비디오 방처럼 꾸며진 전시실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던 도슨트가 말했다.


"이 방은 빨간 비디오, 그니까 (속삭이며) 야한 비디오가 있는 곳이에요. 아쉽게도 여러분들은 볼 수 없는 공간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나는 마지막 방에 가서야 의도치 않게 숨겨왔던 나의 정체를 드러냈다. "선생님, 저는 성인이에요." 도슨트 선생님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분이 친군 줄 알았어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두 분 모두 청소년인 줄 알고 좀 쉽게 설명해 버렸네요." 아 그래서 설명이 재밌었던 거구나! 갑자기 해보지도 않은 도슨트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쉽게도 신분증을 챙겨 오지 않아서 -빨간 비디오가 전시장에 있을 줄 알았으면 갖고 왔을 거다- 금단의 방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헤어지기 전에 저는 사실 도슨트 교육생이고, 도슨트를 듣고 과제를 제출해야 하며, 이 도슨트가 제 첫 도슨트 체험이다 라며 구구절절 나의 방문 목적을 용기 내어 밝혔을 때, 도슨트 선생님이 웃으며 응원해 주시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한 시간을 걸으니 허기가 졌다. 오늘은 내가 쏠게! 10살 어린 막냇동생이랑 내가 친구라 착각했다 하셨으니 기쁜 마음으로 동생에게 밥을 사줬다. 자극적인 마라탕을 나눠먹으며 동생이 말했다.



언니 오늘 너무 재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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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에 돌아와 과제를 제출했다. 스크립트는 아직 잘 안 써져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날에 급하게 아무렇게나 써서 제출했다. 강사님의 피드백이 돌아왔다. 스크립트는 완성도가 엄청 떨어지는데, 후기 과제는 도슨트가 재밌었던 마음이 가득 느껴지네요. 정말 업된 게 눈에 보여요. 읽으면서 평가하는 저도 들어보고 싶어 지는데, 승현선생님도 이런 도슨트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런 도슨트가 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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