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8천 신들의 이야기

제주의 민속

by 박현

제주는 수많은 신이 생겨나고 머물고 있는 신들의 고장이다.

모든 신을 합치면 1만 8천이라고 하는데, 제주는 자연과 사람과 신이 어우러진 삼위일체의 섬이라 할 만하다.

제주의 신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이 다를 뿐 인간 세상을 그리워하며 사람을 돕는다.

제주의 신은 소탈한 모습이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 많은 사람의 한쪽 마음을 닮았다.




제주도에는 ‘신구간’이라는 말이 있다.

신구간은 신의 역할과 임무가 바뀌는 때를 말한다. 절기상으로는 대한과 입춘 사이 지상에 머물던 온갖 신들이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천상으로 올라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다시 땅으로 돌아온다. 신들이 집을 비우면 이사나 집수리 등 꺼리던 일을 하게 되는데, 인간으로서는 일종의 신에 대한 배신 행위일 수도 있다. 신구간이 끝나면 하늘에서 땅으로 새로운 신들이 돌아오는 ‘새철 드는 날’에 입춘굿으로 새해를 맞는다. 이러한 풍속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탐라국 입춘굿에는 제주의 대표 신들이 등장한다.


‘설문대여신’은 제주섬을 만든 창조의 신이다. 설문대할망이 물장올호수 속으로 걸어가는 최후의 장면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오백장군 아들들이 한라산 곳곳을 헤매다니다 굳어져 바위가 되고 해마다 봄이 되면 꽃으로 피어나 붉게 물들인다.

‘영등신’은 바람의 신이다. 영등할망은 바다와 땅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씨를 뿌린다. 그녀가 제주를 찾을 무렵 바다는 거칠고 떠난 뒤에는 잔잔해진다고 한다. 음력 2월을 제주에서는 ‘영등달’이라 부르는데, 이 기간에는 해녀들은 물질을 하지 않는다.

‘자청비’는 농경의 신이다. 메밀꽃 축제의 마스코트이기도 한 자청비는 오곡의 씨앗을 지상으로 몰래 가지고 온다.


이러한 신들의 이야기는 심방(‘무당’을 이르는 말)의 입으로 전해진다.

심방이 신의 근본 내역을 풀어내는 행위를 ‘본풀이’라고 하는데, 신이 태어나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좌정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풀어낸다.

본풀이는 인간이 신을 만나는 무대인 굿을 통해 엔터테이너인 심방이 인간 세상의 삶과 애환을 읽어내는 특별한 공연이다.

‘제주큰굿’에서는 천지왕, 삼승할망, 삼시왕, 서천꽃밭 꽃감관 이공 등 열두본풀이가 펼쳐진다.

본풀이는 천지개벽, 생명의 탄생 등을 주관하는 일반신 본풀이 외에도 마을 수호신 이야기를 담은 당신 본풀이, 일월신이라고 불리는 조상신 본풀이가 있다. 일반신 본풀이는 대형 종합의례라고 할 수 있는 큰굿에서 행해지고, 마을의 본향당에서는 당신과 조상신 본풀이가 행해진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초반부는 제주 신화를 배경으로 했다.

오래된 팽나무 가지에 색동천이 매달려 늘어진 모습은 제주 무속신앙의 성소인 본향당을 떠오르게 한다.

제주를 이야기의 섬이라고 한다. 제주신화가 깃든 아름다운 마을에 1만 8천 신들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설화는 구전으로 이어져 온 이야기를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신들의 이야기인 제주신화는 제주를 좀 더 특별한 섬으로 만들어 주지 않을까?



* 신구간 :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의 줄임말로 관(官)은 신을 의미함. 제주에 있는 신들이 임무 교대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기간으로 대한(大寒) 이후 5일째부터 입춘(立春) 전 3일 까지를 말함. '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사나 집안일을 해야 동티(신의 성냄으로 인한 재앙)가 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신구간풍습이 이어져 왔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