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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프로 Oct 21. 2020

내 자발적 방황에 힘이 된 말말말

*"자발적 방황"이라는 용어는 친구의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직장 8년 차에 번아웃과 함께 찾아온 뒤늦은 커리어 사춘기를 치열하게 앓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결혼과 이민, 이직이라는 삶의 커다란 관문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나 지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나 자신에게 1년의 안식년을 주기로 하고 2017년 11월, 퇴사를 했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의 과정과 영향을 미친 요소들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따로 정리를 해보고 싶다.)


짧지 않은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일을 쉬면서 여러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 정체되는 것 같은 두려움.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꿋꿋하게(?) 쉴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준 말들을 정리해봤다.


1. 이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무엇 때문일까? 그때,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일까?


몇 년 전, 내가 에어비앤비에서 리빙 디자인 페어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매니저였던 패트릭이 해주신 조언이다.


당시 나는 프로젝트의 매니저였는데,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고 준비할 것은 산더미였다. 게다가 처음 맡은  프로젝트이다 보니 잘하고 싶은 욕심도 컸다. 코엑스에서 진행되는 서울 리빙 디자인 페어에 에어비앤비 부스를 마련해서 신규 호스트들을 모집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부스 디자인, 부스 방문객들에게 나눠줄 선물, 온오프라인 이벤트, 초대장, 당일 행사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신경 쓰고 결정해야  일들은 끝이 없고,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의견은 넘쳐나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순간 이러다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왔고, 고민 끝에 패트릭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만약 2개월 후에 프로젝트가 완전히 실패한다면, 무엇 때문일 것 같아요? 그때 가장 후회되는 한 가지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그것에 집중해봐요.


그 말을 들으니 지금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졌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면 기대 이상의 화려한 성공은 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실패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신규 호스트 모집이었기 때문에,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모집된 신규 호스트 수가 적은 것이었다. 부스가 예뻐서 방문객이 많고,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많이 올라가고, 블로그 포스팅과 기사가 많이 나더라도 모집된 신규 호스트 수가 적다면 프로젝트는 대실패였다. 그런 상상을 하니, 호스팅을 해볼 의향을 가지고 부스를 찾은 예비 호스트분들을 충분히 돕지 못하고 돌려보낸다면 가장 후회될 것 같았다. 그래서 부스에서 예비 호스트분들을 놓치지 않고 돕는 프로세스에 집중을 했고 (예를 들면 부스의 1/3을 사전 선별된 사람들을 위한 1대 1 집중 상담 공간으로 정했다), 페어 기간 동안 600명의 신규 호스트를 모집할 수 있었다.


자발적 방황을 하는 동안에도 이 조언을 항상 되뇌었다. 퇴사를 하고 첫 5개월은 결혼, 이민, 이사로 정신없이 지나갔고, 6개월째 완전한 쉼을 만끽하게 되었다. 앤써니가 출근을 하면 운동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산책하고, 공부하고, 글도 쓰고, 취미생활도 하고, 가끔 사람들을 만나는 생활이 생각보다 심심하지 않았다. 느리고 행복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퇴사를 하고 세계여행을 한 친구, 책을 출간한 친구, 멋진 프로젝트를 진행한 지인, 서비스를 뚝딱 만들어서 론칭했다는 사람들의 스토리를 듣다 보면 나도 쉬기만 할 게 아니라 뭔가 특별한 것을 해야 한다는 불안과 압박을 느꼈다. 다시 구직을 시작하면 “쉬는 동안 무얼 하셨죠?”라는 질문을 받을 게 뻔한데, “쉬면서 취미생활을 했습니다.”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에게 물었다.


시간이 흘러 자발적 방황의 시간을 돌아봤을 때, 하지 않아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뭘까? 멋진 프로젝트를 하지 못한 것과 충분히 쉬지 못한 것 중 무얼 더 후회할까?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답이 다르겠지만 그당시 나의 대답은 쉼이었다. 직장인에게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는 1년의 휴식. 막 결혼을 했기에 더욱 다시 오기 힘들 시간. 번아웃된 나의 상태. 그리고 결혼생활이라는 새로운 모험에 막 발을 들인 상황. 지금 내 고갈된 심신을 채우고, 결혼생활의 첫 돌들을 잘 쌓고, 그동안 일 때문에 못 했던 좋아하는 일들을 하고, 나 자신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인생의 나침반을 재조정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앞으로의 10년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조급함을 달랬다.


3년이 지난 지금, 다행히 쉬는 동안 거창한 일을 벌이지 않고도 원하던 직장에서 즐겁게 다시 일을 하고 있다. 번아웃도 극복했고 결혼생활도 안정적이다. 내가 일을 다시 시작하고 바빠지자마자 앤써니와의 다툼이 잦아지는 걸 보고, 역시 신혼을 백수로 보낸 건 잘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심리적 압박과 불안감이 나를 덮칠 때면 스스로 질문을 한다. “10년 후에 나는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


2. 자신감은 나의 능력과 과업 난이도를 상대적으로 비교한 개념이다.


자신감, 자존감, 자존심은 종종 섞어서 쓰이는 개념이다. 비슷한 듯 서로 다른 이 세 가지 개념을 구별하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그중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정확하다고 느꼈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자존감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이다. 내가 나에게 부여하는 절대적인 레벨 (예: 0-10).

 • 자기 효능감 : 나는 쓸모가 있는가?

 • 자기 조절감 :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가?

 • 자기 안전감 : 나는 나로서 안전하고 편안한가?


자존심은 자존감이 떨어졌을 때 자존감을 지키거나 높이려 하는 마음 상태이다.


자신감은 나의 능력과 내가 하려고 하는 특정 과업 난이도의 상대적 비교이다. 높거나 혹은 낮거나.


자만심은 자신감이 과할 때(나의 능력이 하려는 과업 난이도보다 월등히 높다고 생각할 때)의 마음 상태이다.


이 중 자신감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첫째로, 자신감은 특정 과업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자신감이 낮아요'라는 말은 성립되지만 '저는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에요'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것. 어떤 일에는 자신감이 높고 어떤 일에는 자신감이 낮은 것이지, 나라는 사람이 자신감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감은 내 능력과 과업 난이도의 상대적인 비교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 자신감이 낮다면 둘 중 하나를 조정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내 능력을 하고자 하는 과업의 난이도만큼 높이거나, 혹은 하고자 하는 과업의 난이도를 현재 나의 능력에 맞게 낮추거나.


이 두 가지를 깨닫는 순간, 자신감을 상실했다고 느꼈던 나 스스로가 전보다 덜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자발적 방황의 시간을 걱정과 자책, 자기 연민으로 보내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내 능력의 갭(gap)을 좁혀나가는 것에, 그래서 그 일에 대한 자신감을 높이는 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3.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 "산을 타는 기술은 사막에서는 써먹을 데가 없다."


목표/꿈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들 한다. 이 질문을 받으면 답을 몰라도 마치 아는 것처럼 임기응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꼈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목표도 없고 꿈도 없단 말인가...ㅠ 자발적 방황을 하는 동안에도 그런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스티브 도나휴의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책에 따르면,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산을 타는 기술을 써먹어야 할 때가 있고 사막을 건너는 기술을 써먹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인생의 대부분은 사실 산 보다 사막을 더 닮았다고 한다. 도달해야 할 정상이 명확한 산과는 달리 사막에서는 사방에 목적지도 방향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막에서는 산을 탈 때 유용한 기술 - 오르고자 하는 봉우리(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 효과적으로 도달하기 위한 기술 - 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


사막을 건널 때에 유용한 기술 혹은 팁은 다음과 같다.


1) 지도가 아닌 나침반을 따라야 한다. 나침반은 길이 아닌 방향을 알려주고, 목적지보다는 여정 자체에 중점을 두게 한다. 나아가야 할 길이 분명하게 보이기 전까지는 목표나 도착지를 염두에 두어선 안된다.

2) 오아시스를 만나면 반드시 쉬어야 한다. 언제 다시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3) 모래에 갇히면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야 한다. 바람이 빵빵한 타이어로는 모래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4) 필요할 때 일찍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언제 돌발상황을 맞닥뜨릴 지 모르는 사막 여행에서는 혼자서, 함께 여행하며 때때로 다른 차에 깃발을 흔들어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5) 캠프파이어에서 한 걸음 멀어진다. 친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져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충고나 비판, 또는 평가를 피해야 한다. 때로는 자아비판이나 판단도 피해야 한다.

6)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과 불안감이 불러내는 허상의 경계에서 여행을 멈추어선 안된다.


지금 내가 인생에서 사막을 만났다면 목적지를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럴 때에는 성급한 목적지를 정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목적지 대신 방향(내면의 나침반)에 의지하고, 목적지가 보일 때까지 여정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앞으로의 목표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솔직하게 모른다고,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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