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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락 Jun 07. 2022

서울숲 N차 방문

취향의 발견

"독창성이란 자신을 변함없이 진실하게 대하는 과정이다."

                                   -줄리아 카메론 '아티스트웨이'


서울숲 근처로 이사 온 후 지인들을 꾀어내기 쉬워졌다. 다른 동네 살 때는 집 근처로 오라고 하기가 뭣했는데 서울숲과 성수는 핫플레이스 중에서도 핫플인지라 살짝 흘리면 대부분 흔쾌히 왕림해 주신다.


와서도 연신 진짜 사람 많다며 오랜만의 사람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라한다. 마치 나만 아는 식당 인양 이미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식당과 카페로 가이드하면 여행 만족도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핫플은 넓고 밥집은 많다. 선택이 어려운 만큼 눈앞에 아른거리는 허다한 맛집을 제쳐 뒤고 나는 그냥 가던 곳을 간다.


내게는 N 방문이지만 나의 지인은 이번이  번째 방문이므로 안전한 선택으로 기운다.


자전거는 유연한 몸짓으로 나들목을 빠져나와 한강 자전거길로 접어든다. 10 남짓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어느새 서울숲 초입이다.


벌써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길은 붐비고 숲은  공간 없이 가득  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오면 뚝섬역 인근의 핫플레이스가 펼쳐진다.


차와 사람이 뒤엉킨 공간에서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며 실패하지 않을 맛집을 고른다. 그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는 주저함 없이 N차 방문을 위한 그 집으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오늘도 실패하지 않으리라!


일드 '닥터 X'의 히로인 프리랜서 외과의 다이몬 미치코는 "나는 절대 실패하지 않으니까."라는 말로 수술을 시작한다. 시즌 7까지 다이몬 미치코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


닥터 X 7, 도라마코리아 공식 이미지

나도 맛집 선정에 있어서 실패한 적이 없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결연한 각오로 맛집 문을 연다. 보통은 평일 오전 11시 30분 전후로 도착하면 기다림 없이 착석할 수 있다.


호스트인 내가 먼저 와 기다리는 건 일종의 예의다. 멀리서 찾아오는 지인은 보통 10분 정도는 늦는다. 코리안 타임, 흔히 있는 일이니 여유 있게 기다리면서 메뉴판을 쭉 훑어보고 사진을 찍어 메시지로 첨부해 보낸다.


두세 가지 정도 시그니쳐 메뉴를 추천해서 고르라고 하면 상대방은 그렇게 편해   없다. 즉시 답문이 온다. 예상했던 답을 보고 싱긋 웃는다.


같은 메뉴를 시키기보다는 상대가 다른 맛도 느낄  있도록 먹어   가장 나은 다른 메뉴로 주문한다.


이것이 기본적인 나의 서울숲 N차 방문 메뉴얼인 셈이다.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소녀방앗간 서울숲시작점

분명 윈도에는 11 OPEN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붙어 있는데 11 30분이 넘어도 문은 잠겨 있다.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분주히 식탁을 세팅하고    문이 열린다. 아무 자리  원하는 곳에 앉으라는 말에 창가  제일 좋은 자리로 쪼르륵 달려가 앉는다.


친구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며 오늘도 승률 100%를 달성하겠다는 자신감에 메뉴판을 펼치고 어떤 걸 먹으면 좋을지 친절히 설명한다.


마치 음식 전문가라도 되는 양 전에 이걸 먹었더니 좋았다고 몇 가지를 추천하고 조용히 기다린다. 친구는 그중에 하나를 먹어 보고 싶다며 에둘러 말한다.

산나물밥과 우렁된장찌개

주저함 없이 그 메뉴를 시키고 그것과는 좀 다른 씀씀한 맛의 메뉴를 추가한다. 같이 나눠 먹으면 어떻겠냐는 말을 덧붙이며 우아한 주문은 그렇게 끝난다.


 모든 과정이 나는 하나의 춤사위 같이 느껴진다. 동작 하나하나에 진심이다. 메뉴판을 보는 친구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섬세하게 메뉴판을 응시하고 마침내 하나의 깨달음에 이른  '이걸로 할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하나의 메뉴를 선택한다.


인생도 이와 같을 수만 있다면! 수많은 음식점 중에 누군가 N차 방문을 하고 추천해 준 그곳에서 여러 메뉴 중 시그니쳐 메뉴를 골라 실패 없이 그날의 식사를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력 있게 솟구쳐 오르다 하강하는 그 리드미컬한 운동이 일상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충만하리라.


서울숲  맛집은 내게 하나의 공연장 방문과 같다. 무슨 공연을 볼지 선택하는 순간부터 나의 여행은 시작된다.


어플에서 미리   음식을 감상한  평점을 확인한다. 여기까지 작업은 순조롭다.


이제 지인의 허락을 구하고 그의 왕림을 손꼽아 기다리다 보면 공연 날짜는 임박한다. 11시 30분. 오픈과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빈 테이블이 하나씩 찬다.


직원들은 일정한 리듬에 따라 솔 정도의 옥타브로 주문을 받고 메아리처럼 나의 주문을 확인한다. 친절한 나는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해 주고 컵에 물을 따른다. 여기까지가 나의 서비스.


생각보다 빨리 나온 음식에 한번 감탄하고 한 숟가락 입에 넣고 맛에 또 한 번 감탄한다. 친구가 맛있게 먹으니 자축을 하며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며 호기롭게 카드를 들어 보이면 공연은 절정에 이른다.

센터커피

난 그 절정의 순간이 좋다. 마치 폭죽이 터지는 듯 매혹적이다. 식사를 마치고 서울숲과 이어진 '센터커피'에서 드립커피를 주문하고 좁은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친구는 "이거 노출 콘크리트 아니야?라고 짐짓 아는 체 하며 묻는다. 굳이 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에 '그런 것 같아'라고 대답하며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인가 봐"라며 친구의 눈썰미에 인정의 양념을 친다.


 모금, 진하게 향이 올라오고 산미가  안에 퍼진다. 오길 잘했다. 커피값은  비싸지만  정도는  줘야지. 마음은 그렇게 자본주의와 취향 사이에 타협을 이룬다.


커피를 마시며 100분 토론에 가까운 격정 대화를 마치고 서울숲으로 이어진 문을 열고 나온다. 숲으로 점점 스며든다. 작은 호수 근처 벤치에 앉아 이번엔 일상을 얘기한다.


우리는 어느새 이만큼 왔고 또 살아온 만큼을 살아가야 한다. 기대되기보다는 걱정이 되고 신나기보다는 힘겹다.


구름이 잔뜩 낀 날 바람이 불고 숲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바람을 맞았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말을 되뇌며 서울숲역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안녕, 평안히 가시길! 이러고 보니 무슨... 그 친구는 살아있다.    


누구보다 천천히 페달을 밟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혼잣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다.   


어느새 집이 보이고 자전거를 잘 바쳐 놓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조용한 기다림 끝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이 공연도 어느새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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