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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산 Dec 13. 2021

패배자들을 위하여

<광대한 여행>

고생대 실루리아기의 연못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게 먼 옛날에, 그렇게 하찮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 무슨 소용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꽤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곳에 뾰족코 물고기가 살았어요. 정식 이름은 '민물 총기어'이지만 진흙바닥을 파헤치는 입가의 촉수 때문에 그렇게 불렸죠. 이들은 바다에서 쫓겨난 패배자들이었습니다. 변변한 방어무기도 갖추지 못한 약자들이어서, 당시 바다를 지배했던 쾌속 지느러미 경골어류들에 쫓겨 캄캄한 심해로 가거나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마지막 생존자들이 민물을 택했죠.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갯벌을 통해, 또는 내륙 습지로 이어지는 수로를 통해 이들은 염수와 담수 사이의 보이지 않는 화학적 장벽을 뚫고 이동했습니다. 뾰족코 물고기는 민물로 들어온 최초의 척추동물이었어요. 그들이 이 위험한 여행을 떠난 이유는, 육지의 습지가 바다의 포식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연못마저 웅덩이로 변해갔어요. 실루리아기의 가뭄 때문에 말라가면서 썩고 악취가 진동했죠. 그곳에 사는 모든 것들은 이내 찐득찐득하고 뜨거운 진흙 속에서 죽어갈 운명이었습니다. 뾰족코 물고기들도 마찬가지였죠. 이 연약한 것들은 천적을 피한 대가로 마주한  태양빛, 태곳적 식물들이 자라는 황무지의 모래바람에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사건은 어느날 밤에 일어났어요. 해가 완전히 지고, 물가의 어둠 속에서 이슬이 내리고, 텅 빈 개울 바닥에 냉기가 찾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올랐을 때 연못은 거북등처럼 갈라진 진흙바닥을 드러냈지만, 뾰족코 물고기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완전히 사라진 겁니다. 


자, 그날 밤의 광경을 떠올려보죠. 살아남은 뾰족코 물고기들이 몇시간 동안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무거운 지느러미 밑둥에 의지하여 개울 아래쪽에 있는 다른 연못까지 뒤뚱뒤뚱 걸어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비웃어서는 안 됩니다. 뾰족코의 얼굴이 3억년 뒤 우리의 얼굴이 될 테니까요. 


이것은 척추동물이 최초로 물을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뾰족코들은 물속의 산소가 거의 사라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가미를 보조하는 작은 장기를 통해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육상동물의 폐가 되었죠. 이들은 산소를 많이 잡아먹는 신경조직 덩어리 대신 뇌 뒤에 있는 두 개의 얇은 막에 의지해 생존했습니다. 이것이 고등동물의 대뇌 반구가 되었어요. 뾰족코들은 다른 생명보다 약했기 때문에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세계에 적응해간 것입니다.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의 <광대한 여행>의 한 장면입니다. 생명의 역사에서 강자들은 모험을 할 필요가 없어요. 약한 자들, 패배한 자들,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진따'들만이 생명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위대한 혁명을 감행했습니다. 패배자가 때로는 진정한 승리자일 수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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