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잘난 척에 대한 소고(小考)

by 현율


중학교 입학을 몇 달 앞둔 시절 아이들은 소년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두들 훌쩍 건너가던 시간의 경계 앞에서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해가 바뀌면 교복을 입게 될 거라는 말, 좋은 시절 갔으니 운동장보다 도서관에 익숙해지라는 충고들 모두 그에게는 비현실적인 가정이었다. 그는 매캐한 운동장의 흙먼지, 철봉에 매달렸던 손바닥의 쇠 냄새, 삽화가 글자만큼 많은 책들이 여전히 좋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그의 담임교사는 아이들의 다채로운 시간들이 저물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어 시간에는 소설과 시를 읽어주었고, 미술시간에는 세상의 모든 화가들을 소개하려고 애를 썼다. 실눈을 뜨지 않으면 하늘을 볼 수 없던 계절, 어느 날 담임은 커다란 스피커가 붙어있는 오디오 기기를 들고 교실에 나타났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이 환갑을 바라보는 주름진 교사의 얼굴과 커다란 스피커를 따라 굴러다녔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음악이 시작되는 동안 교사는 설명 대신 눈을 감았다. 그 때 그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대부분 아이들은 낯설고 생경한 음악에 곧바로 시큰둥해졌지만 그에게는 달랐다. 짜릿하고 섬세한 리듬이 그의 온 몸을 휘감다가 교실을 가득 채우고는 눈부신 가을 하늘로 흩뿌려지는 장면들을 보았다. 그 음악은 소년의 시대를 벗어나는 자신만을 위한 위로의 노래이기도 했고, 미지의 세상에서 벌어질 가슴 뜨거운 일들의 서막 같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심장이 우짖는 소리라고 느꼈던 그 음악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모은 돈으로 음반가게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구매했고, 바이올린 선율이 첼로의 그것이 되도록 집시 멜로디를 끝없이 들었다. 그 후 그가 클래식 음악에 심취한 청소년이 되었을 거라고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그를 맑은 소년의 얼굴에서 반항이 묻은 고적한 표정으로 이끈 건 전자기타 소리 자욱한 팝송들이었다. 하지만 헝가리 무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는 언제나 그의 책상 주변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 클래식 음악을 얘기하면 주저 없이 브람스나 헝가리 무곡을 이야기했고, 중학교 학적부 속 그의 취미는 클래식 음악 듣기라고 적혀있었다. 특히 브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친구들이 그를 바라보던 시선은 그를 한껏 기분 좋게 해주었다. 그는 알았다. 꿈결같이 감미롭게 자신을 휘감았던 헝가리 무곡과 브람스 얘기가 친구들 앞에서 우월감도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을.


시간이 많이 흐르고 소년의 자취는 말끔히 사라진 후 그는 클래식 음악을 좀 아는 것처럼 보이는, 실상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만 들어봤던, 기이한 취향의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음악대학에 다니는 사람과의 우연한 소개만남 자리부터 가끔씩 기억하던 브람스 이야기나 클래식 음악의 감흥은 지우고 살았다.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던, 브람스가 작곡하거나 편곡했던 헝가리 집시의 선율들은 기실 오래전에 망각한 후였다.


그가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브람스를 다시 발견한 건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과 근원 없는 외로움에 시달리던 시기, 흥미롭게도 대학 도서관에서였다. 하릴없이 문학 서고를 배회하던 그의 눈에 어떤 책등에 적힌 글이 선명히 들어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이었다. 그는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서고 책상에서 그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유년시절의 두근거림과 사춘기의 어쭙잖았던 잘난 척과 이제는 리듬조차 희미해져버린 집시 춤곡의 은율을 모두 다시 기억해냈다. 그리고 까마득한 시간 속에 머물러 있던 그 춤곡이 사실은 그가 살아온 많은 시간 동안 그의 주변에서 함께 떠돌고 있었음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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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