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읽고 있다. 이전 작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기억의 배신과 확신의 오류가 얼마나 잔혹한 서사와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밝힌 이번 작품은 기억 속으로 회귀하는 일이 결국 자아의 정의가 아닌 삶의 슬픈 자화상이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에 이르게 한다.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낡은 기억들을 끊임없이 들춰내는 부작용에 시달리게 된다.
하염없이 떠오르는 생각들. 지나간 나의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 삶에 들어왔고 나갔을까. 그들 중 일부는 지금도 내 삶 속에 터를 잡고 있으나, 뿌연 연기로 흩어져버린 인연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그들을 얼마나 많이,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그들의 말과 언어와 몸짓을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없어도 나는 일깨워낼 수 있을까. 때로 짧은 순간 스쳐갔던 수없이 많은 시선들은 과연 내 기억 속에 얼마나 남아있을까.
내게 있어 이따금 타인의 눈동자는 나의 묻어두었던 기억을 소환하는 기이한 역할을 하곤 한다. 그것은 도대체 얼마나 오래 전 일이었을까. 세상이 모두 불쾌하도록 축축하게 젖어있던 어느 여름이었다. 나는 무거운 습기를 피해 시내 서점 안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확신하지 못한 소설책 한 권을 뽑아들고 계산대 앞 긴 줄에 합류했을 때, 내 앞에는 코 밑 솜털이 남아있는 남학생이 참고서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옆에는 일생동안 한 번도 멋을 부려본 적 없을 게 확실한 학생의 엄마가 지갑을 들고 서 있었다. 무거운 책들을 안고 있는 아이의 하얀 얼굴은 서둘러 계산을 끝내려고 두 손으로 지갑을 움켜쥔 엄마의 홍조 띈 얼굴과 대비되고 있었다. 내 무료했던 시선은 남자 아이가 들고 있는 서적들의 책등으로 하릴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선명하고 또렷하게 내 시야에 들어 온 책 한권이 수학과 영어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삶은 고단하다. 그건 낮과 밤을 모두 책상에서만 보내는 대다수 설익은 청춘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나 역시 성인이 되기 전 문학적 취향으로 포장해서 모파상 <여자의 일생>이나 최인호 <별들의 고향> 속 특정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기도 했다. 그 뿐이겠는가. 같은 반 아이들이 어디선가 구해 온 도색잡지를 빠지지 않고 흘끔거리곤 했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성인만 구매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학창시절 나는 미성년자(未成年者)라는 단어에 심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완성되지 못한 자’라는 의미가 얼마나 모욕적인가. 그 반감은 친절하고 다정한 청소년 권장 도서를 외면하고, 바닥을 알 수 없는 호기심에 내 시선을 저당 잡히도록 했다. 하지만 그 아이의 품에서 수학과 영어 사이에 숨어 있던 그 뜨거운 책이 계산대에서 드러나는 굴욕적 참극은 피하도록 해줘야 했다.
“저기 어머님, 아이가 구매할 수 없는 책이 한권 있는 것 같네요.”
나는 최대한 정중하고 친절하게, 학생은 물론 그 누구도 듣지 않도록, 오직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살아갈 어머니에게만 들리도록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아이의 엄마, 아니 정확하게는 여전히 여성이고 누구에게나 그렇듯 인생이 소중한, 정당한 스스로의 인격을 보유한 한 여성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내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또렷하면서도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알아요.”
그녀가 짧은 순간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내가 느꼈던 그 많은 감정들은 여전히 불식간에 솟아나는 기억들이다. 내가 우려했던 아이의 굴욕적 참극은 선입견과 바보 같은 참견으로 무장한 내 몫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계산대에 이르러 아들로부터 책들을 건네받았고, 계산을 마치고 자신의 책은 그녀의 가방에 담으며 떠났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짧은 순간 그녀에게 보냈던 내 모욕적 배려들과 뒤섞여 두 다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금도 이따금 마주하는 서점 계산대의 긴 줄은 또렷하고 선명하며 공격적이었던 어떤 눈동자를 기억하게 만든다.
삶과 기억은 그렇게…… 돈키호테식일 수 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줄리언 반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7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