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에서
요즘 미국 시간으로 2025년 4월 2일 오후 5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관세로 인해 시장이 매우 혼동에 빠져 있습니다.
아래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으로 인해 100년 전 대공항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5가지 관점에서 당시와 유사하는 것을 정리한 기사의 링크입니다.
저는 대공황에 대해 아주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는 것 그리고 케인즈의 등장, 2차 세계대전의 원인 등 단편적인 것만 알고 아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차에 집에 있는 책들에서 대공황에 대한 부분들을 읽어보고 정리해 보기로 욕심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경제학자도 아니고 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황에서 대가들의 책에서 이 주제들을 뽑아서 정리하다 보면 뭐가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책으로는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를 골라 보았습니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이기도 하고 경제학자가 아닌 역사학자로는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극단의 시대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1991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책입니다.
이 시리즈는 제가 소장한 책중에 대공황에 대해 기술된 것들만 골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본글로 들어가기전에 아래 시기를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1차 세계대전 : 1914년 7월 ~ 1918년 11월
- 경제대공황 : 1929년 ~ 1939년
- 2차 세계대전 : 1939년 9월 ~ 1945년 9월
아래의 내용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저작 '극단의 시대 (The Age of Extreme)'에서 3장 경제의 심연 속으로 (Into the Economic Abyss)를 저의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번역서가 아닌 원서를 기반으로 해서 까치에서 2009년 발간된 번역서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Abyss라는 단어가 심연 그리고 깊은 구렁 또는 구렁텅이로도 번역이 되는데 '구렁텅이로 들어간 경제'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1. 에릭 홉스봄은 대공황 (Great Depres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해당 챕터의 제목은 경제의 구렁텅이(Economic Abyss)로 정한 다음 1929년과 33년 사이를 대침체(Great Slump) 시기로 규정한다. 이글에서는 혼동을 줄이기 위해 대공황이 일어났던 1929년에서 1939년 사이를 대공황, 1929년과 1933년 사이를 대침체로 사용했다.
2. 대공황이전 농부들이 기복이 있는 날씨를 받아들이듯 사업가와 경제학자들이 장단기 파동과 사이클을 받아들였으나 세계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만 카를 마르크스 등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결국 극복할 수 없는 내부 모순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일부라고 믿었으며, 파동이 경제 시스템의 존립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생각했다.
3. 산업혁명 이후 세계 경제의 역사는 기술 진보가 가속화되고, 지속적이지만 불균등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세계화'로 불리는, 즉 점점 더 정교하고 복잡해지는 글로벌 분업과, 세계 경제의 모든 부분을 글로벌 시스템에 묶는 점점 더 밀집된 흐름과 교류의 네트워크의 증가로 이루어졌다. 비록 대침체 시기에 경제 성장은 크게 둔화되었으나 그 이후 지속적으로 세계 경제는 성장했다.
4. 기업인과 정부 모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번영을 이루었던 1914년 이전의 경제상황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
5. 앵글로-색슨 세계, 전시 중립국들, 그리고 일본은 자국 경제를 전쟁 이전의 건전한 재정과 금본위제에 기반한 안정된 통화 원칙으로 되돌리기 위해 가능한 한 디플레이션을 시도했다. 이들 국가는 1922년에서 1926년 사이에 어느 정도 이러한 회복에 성공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소련 러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패전과 혼란의 지대에서는 통화 체계가 극적으로 붕괴되었다. 극단적인 사례였던 1923년의 독일에서는 통화 단위가 1913년 가치의 1조 분의 1로 떨어졌다. 사실상 화폐가치가 0이 되었다.
5. 독일은 민간 저축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기업 활동에 필요한 운전자본이 거의 전무한 상태가 되었고, 이는 그 후 수년간 독일 경제가 외국 자금에 대대적으로 의존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로 인해 독일 경제는 경기 침체가 닥쳤을 때 유난히 취약해졌다.
6. 독일 국민들은 전 재산을 잃게 되었고, 반면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에서는 화폐 가치의 극히 일부라도 보존될 수 있으나 독일과 중부 유럽의 중산층 및 하층 중산층에 끼친 심리적 충격은 상당했다. 이는 중부 유럽이 파시즘에 쉽게 굴복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7. 1924년경 전후 혼란은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24년부터 1929년까지 1920년대의 호황기라 불렸던 시절에도 미국만 4%대의 평균 실업률을 유지할 뿐 영국, 독일, 스웨덴의 평균 실업률은 10~12%였고,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는 무려 17~18%에 달했다. 당시 경제는 심각한 구조적 약점이 있었는데 수요가 생산 능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존재했던 경기 호황 역시 주로 국제 자본의 거대한 흐름에 의해 유지되었다. 당시 국제자본은 독일로 대거 유입되었다. 1928년 한 해 동안 독일은 전 세계 자본 수출금액의 약 절반을 수입했으며, 차입한 금액은 2만억에서 3만억 마르크에 달했다. 그중 절반은 단기 차입으로 추정된다. 이는 독일 경제를 다시 한번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8. 1929년 10월 29일 뉴욕 증권거래소의 대폭락으로 시작된 이 위기는 세계 경제붕괴로 이어졌다. 북미 산업 경제의 극적인 침체는 곧 다른 산업의 중심지인 독일로 퍼져 나갔다. 미국의 산업 생산은 1929년에서 1931년 사이 약 3분의 1 감소했고, 독일도 비슷한 수준의 하락을 겪었다. 식료품과 원자재 같은 1차 생산품의 가격은 자유낙하 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사실상 전 세계의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혀 세계적 위기로 만들었다.
9. 대침체가 가장 심각했던 시기인 1932년에서 33년 동안, 영국과 벨기에 22~23%, 스웨덴 24%, 미국 27%, 오스트리아 29%, 노르웨이 31%, 덴마크 32%, 독일 44%의 노동자들이 실직 상태였였다. 1933년 이후 경기 회복이 시작된 이후에도 1930년대 전체 평균 실업률이 영국과 스웨덴에서는 16~17% 이하였으나, 스칸디나비아 나머지 국가들, 오스트리아, 미국에서는 20%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 실업을 완전히 해소한 유일한 서방 국가는 1933년부터 1938년 사이의 나치 독일이었다.
10. 대공황의 충격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 것은 실업 구제를 포함한 사회보장 제도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20세기 후반의 기준으로 보면 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11. 단기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결정자들은 장기적인 세계 경제의 번영 기반 자체를 훼손했다. 1929년에서 1932년 사이 세계 무역은 60%나 감소했으며, 각국은 자국 시장과 통화를 보호하기 위해 점점 더 높은 무역 장벽을 쌓아 올렸다. 이는 다자간 무역 체제의 해체를 의미했다. 최혜국 대우는 1931년부터 1939년 사이 체결된 510건의 통상 협정 중 거의 60%에서 사라졌고, 남아있는 경우도 대부분은 제한적인 형태로만 유지되었다.
12. 대공황은 향후 반세기 동안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를 무너뜨렸다.
13. 1931~32년, 영국, 캐나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그리고 미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1936년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금본위주의를 가장 열렬히 신봉하던 프랑스마저도 이를 따랐다. 1931년 영국은 1840년대 이후 영국 경제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 잡아 왔던 원칙인 자유무역을 포기하고. 대공황은 서구 정부들에게 경제 정책에서 ‘경제적 고려’보다 ‘사회적 고려’를 우선시하도록 강제하였다.
14. 대공황 시기 정부들은 단순한 외국산 농산물에 대한 관세 인상이 아닌 농산물 가격을 보장하거나, 생산된 잉여 농산물을 직접 사들이거나, 심지어 농민들에게 농사를 짓지 말라고 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농업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5. 대공황 시기 이후 현대적 복지제도가 도입됨. 복지국가라는 용어 자체도 1940년대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16. 소련은 새로운 5개년 계획하에 초고속 대규모 산업화를 진행하여 1929년부터 1940년까지 소련의 산업 생산이 최소한 세배 이상 증가하는 등의 성과를 보이자 충격을 받은 서구사회에서 ‘계획(Plan)’과 ‘계획화(Planning)’는 정치적 유행어가 되었다.
17.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에 자본주의 경제가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미국과 전쟁 배상금 등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1) 미국
- 1913년까지 미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세계 산업 생산의 3분의 1 이상을 생산하고 있었음. 이는 당시 독일, 영국, 프랑스를 합한 수치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음. 1929년에는 미국이 세계 전체 생산의 42%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세 유럽 산업 강국은 합쳐서 미국의 28%에도 미치지 못했음
-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세계 최대의 산업 생산국으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만들어줌. 영국은 전쟁 중 전체 해외 투자 자산의 약 4분의 1을, 프랑스는 전체 해외 자산의 절반가량을 잃음. 미국은 전쟁을 시작할 때는 채무국이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주요 국제 대출국이 되어 있었음
- 1920년대 미국은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었으며, 영국 다음으로 큰 수입국이기도 했음. 원자재 및 식량과 관련해서는,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무역량이 많은 15개국의 전체 수입 중 거의 40%를 차지
- 1929년부터 1932년 사이, 미국의 수입은 70% 감소했고, 수출도 같은 비율로 감소.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세계 무역은 3분의 1도 채 줄지 않았지만, 미국의 수출은 거의 절반으로 곤두박질침
2) 전쟁배상금 등
-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1921년 독일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은 1,320억 금 마르크(당시 환율로 약 330억 달러)로 책정되었는데 독일이 요구받은 배상금은 1929년 당시 독일 전체 국민소득의 1.5배에 달 하는 비현실적 액수였음
- 독일의 생산품이나 수출 수익에서 배상금을 지급할 수 없었으며, 현금으로만 지급. 이로 인해 독일은 대규모 차입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 지급된 배상금은 대부분 1920년대 중반 미국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대출을 통해 충당
-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연합국이 미국에 진 빚은 영국의 경우 자국 국민소득의 절반, 프랑스는 그 3분의 2에 해당
- 1932년을 기점으로 독일과 연합국 양측 모두의 모든 채무 지급이 중단
3) 이러한 전체 구조는 미국의 대출 감소와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 이후 미국이 대출을 중단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힘
19. 전간기의 경제가 심각하게 붕괴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을 추가적으로 보아야 한다.
1) 미국과 세계 다른 지역 간의 발전 불균형으로 인해 국제 경제 시스템 내에서 뚜렷하고 점점 심화되는 불균형이 나타남. 영국은 세계 결제 시스템이 파운드화 기반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미국은 달러를 통해 글로벌 안정자 역할을 하려고 하지 않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자본, 노동력, 그리고 (상대적으로) 상품 수입에 대한 필요성이 과거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이는 세계와의 연결성 약화로 이어짐
2) 세계 경제가 지속적인 확장을 이끌어낼 만큼 충분한 수요를 창출하지 못함. 1920년대의 번영은 그 기반이 취약. 당시 미국 농업은 사실상 이미 불황 상태에 있었고, 임금은 크게 오르지 않았으며, 호황기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은 실제로 정체 상태였음. 임금의 정체는 기업들의 이익의 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과잉 생산과 투기로 연결되었으며, 결국 경제 붕괴를 촉발
20. 대공황이 정치와 대중의 사고에 끼친 영향은 극적이고 즉각적이었다. 재난이 닥친 시기에 정권을 잡고 있었던 정부는, 우파이든(미국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 1928–32), 좌파이든(영국과 호주의 노동당 정부들) 정권교체를 겪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변화가 특히 즉각적이었다. 1930~31년 사이 12개국이 정권 또는 체제를 바꾸었고, 그중 10개국에서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정치 지형이 대공황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우경화가 두드러졌고, 스웨덴은 예외적으로 1932년에 사회민주당이 집권하며 반세기에 걸친 사회민주주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두 주요 군사 강국, 일본(1931년)과 독일(1933년)에서 민족주의적이고 호전적이며 침략적인 정권이 거의 동시에 등장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21. 대공황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 동안에는 유럽에서는 좌파가 쇠퇴하였으며, 급진 우파가 더욱 강화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 특히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에서는 좌향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북미 대륙에서는 대공황이 좌파적 실험과 정책의 확대를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대공황이 라틴 아메리카와 식민지 세계에 미친 정치적 영향은 총체적으로는 좌파 방향으로 기울어진 경우가 더 많았고, 이는 비록 단기간일지라도 뚜렷한 현상이었다. 또한 대공황은 식민지 민중의 정치적 각성을 촉진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3.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대침체 이후 ‘세상의 룰’이 바뀌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사회, 정치 제도, 경제 이념, 가치관 전체가 붕괴 혹은 후퇴되었으며, 이 위기 속에서 세계는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개혁, 파시즘이라는 세 가지 상이한 길을 모색하게 되었더. 이후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재앙의 시대(Age of Catastrophe)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