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태양을 바라보며

12월 31일의 일몰, 끝과 시작의 경계


12월 31일 오후 5시.


2025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회사는 반차였고,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익숙한 골목을 걷다가, 문득 발걸음이 느려졌다. 고개를 들자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주황빛으로 번지고 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볼 수 없는, 2025년의 마지막 해였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근처 공원으로 들어섰다. 일부러 계획한 건 아니었다. 그냥, 한 해의 마지막 해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벤치에 앉으니 시야가 트였다. 건물들 사이로 하늘이 길게 열려 있었고, 해는 생각보다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주황은 점점 붉어졌고, 하늘은 마치 불을 머금은 것처럼 깊어졌다.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연말 저녁이면 다들 집으로 향하거나 약속 장소로 가기 마련이다. 벤치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잠깐 외롭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금세 사라졌다. 이런 시간에는 혼자인 편이 더 나았다. 누군가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조용히 한 해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25년을 떠올렸다.


1월부터 12월까지, 딱 365일. 빠르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새해 인사를 한 게 얼마 전 같은데, 벌써 끝이라니.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몇 개의 프로젝트를 지나왔고, 이름이 바뀐 직함에 아직도 어색해했고, 이사는 결국 하지 못한 채 준비만 남겼다. 아이의 학예회가 있었고, 부모님의 생신을 챙겼으며, 멀리 떠나는 여행 대신 주말의 시간을 쌓았다.


이룬 것도 있었고, 놓친 것도 있었다.


목표는 세웠지만 대부분은 중간에서 흐려졌고, 계획은 자주 현실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다짐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그래도 하루하루를 건너왔다. 포기하지는 않았다. 완벽하지 않았을 뿐, 멈추지는 않았다.



해가 더 낮아졌다.


이제 건물 옥상 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으로 보였다. 곧 사라질 것이다. 이 해가 지면, 2025년도 함께 뒤로 물러날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되고, 말할 수는 있지만 다시 살 수는 없는 과거가 될 것이다.


후회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더 잘할 수 있었던 장면들이 떠올랐고, 그때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상황에서 가능한 만큼을 했다. 지금의 내가 보기엔 부족해 보여도, 그날의 나는 나름대로 버티고 있었다.


중요한 건 남은 것이었다.


실패 속에서도 배운 게 있었고, 성공 앞에서도 조심스러워지는 법을 알게 됐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 않았다. 아주 조금, 그러나 확실히.



스마트폰을 꺼내 석양을 찍었다.


화면 속 하늘은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실제와는 달랐다. 공기의 차가움도,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감각도, 마음속에서 일렁이던 감정까지는 담기지 않았다. 그래도 저장했다. 기억은 늘 완벽하지 않으니까,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벤치 옆으로 조깅하는 사람이 지나갔다.


연말에도 숨을 헐떡이며 뛰는 모습이 조금 부러웠다. 나는 올해 운동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봄까지만 반짝했다. 내년에는 다를까, 잠깐 생각했지만 곧 웃음이 났다. 아마 비슷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계속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가 반쯤 잠겼다.


주황은 보라로, 보라는 남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낮이 밤으로 넘어가는 경계였다. 2025년이 2026년에게 자리를 내주는 순간 같았다.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니 차가웠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12월 31일의 공기. 내일도 같은 공기를 마시겠지만, 느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새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공기마저 새로워 보이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벤치에서 일어섰다.


집으로 가야 했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해를 봤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윗부분만 남은 빛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졌다.


2025년의 마지막 해가. 하늘에는 여운만 남았다. 붉은 기운이 서서히 빠지고, 밤이 자리를 채웠다.



집에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아내는 부엌에 있었고, 아이는 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왜 늦었어?”라는 질문에 “석양 보느라”라고 답하자, 아내가 웃었다. 낭만은 아니었다. 그냥, 마지막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녁은 평범했다.


특별한 음식도, 특별한 대화도 없었다. 하지만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아이가 물었다.

“내일 새해 되면 뭐가 달라져?”


“달력이 바뀌지.”


아이의 실망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 단순한 변화에 의미를 덧붙이는 일이었다.


밤이 깊어졌다.


제야의 종이 울리고, 아이가 먼저 새해 인사를 했다. 포옹했다. 따뜻했다. 특별하지 않아 더 좋았다.

침대에 누워 오늘과 올 한 해를 함께 떠올렸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살아냈다. 그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눈을 감으며 속으로 인사했다.


안녕, 2025년.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안녕, 2026년.


끝과 시작 사이에서, 석양과 일출 사이에서, 그렇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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