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는 것과 남겨지는 것: 닳아 없어지는 가치

실수와 수정의 비효율적인 과정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삶의 궤적


오랜만에 손으로 글을 쓴다. 종이 위에 연필을 대고 첫 문장을 완성했을 때의 만족감은 잠시, 세 번째 문장에서 망설임이 시작된다.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고, 문장의 리듬이 어색하다. 완벽하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벌써 틀렸다. 이 '틀림'의 감각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자주 찾아온다. 호기롭게 시작한 프로젝트, 야심 차게 맺은 관계, 선명했던 계획이 한순간에 삐끗하는 그 순간 말이다.


지우개를 집는다. 힘주어 박박 문지르면, 종이가 약간 구겨지고 연필 자국이 흐릿한 흑연의 그림자를 남긴다. 그 뒤로 지우개의 분홍색 가루, 즉 찌꺼기가 책상 위에 쌓여간다. 손으로 쓸어내어도 다시 쓴 자리에서 또다시 실수를 범하고, 또다시 지우개 찌꺼기가 생성된다. 나는 이 분홍색 가루를 바라본다. 이 잔해들은 단순히 더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저지른 실수들의 집합체이자, 동시에 그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하며 소모한 나의 에너지의 흔적이다.


연필은 쓸수록 짧아지고, 지우개는 지울수록 닳아 없어진다. 둘 다 소모되어 사라져가지만, 그 소모를 통해 비로소 종이 위에는 어떤 '가치'가 완성되어가고 있다. 이 '닳아 없어짐'에 대한 시선은 곧 우리의 노력과 헌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축적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새것일 때의 연필과 지우개는 완벽하다. 날카롭게 깎인 연필심, 각이 살아있는 모서리. 하지만 이 완벽함은 **'정지된 상태'**를 의미할 뿐, 아직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 미지의 상태다. 우리는 때로 지우개를 아낀다. 너무 예뻐서, 실수할까 봐 두려워서,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꺼내지 않는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지우개처럼, 쓰지 않은 용기는 결국 무용지물이 된다.


반면, 매일 사용하는 지우개는 빠르게 닳는다.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한쪽이 먼저 기울어져 닳는다. 이 지우개의 닳음은 지속적인 수정과 노력의 비효율성을 증명한다. 우리는 왜 한 번에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고 계속 지우고 다시 써야 하는가?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보면 이 모든 과정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연필은 지우개가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다. **'틀려도 괜찮아, 지우면 돼'**라는 믿음이 있기에 주저 없이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있다. 지우개는 실수에 대한 보험이자, 연필에게 끊임없이 '시도하라'고 속삭이는 내면의 목소리다.


닳아 없어지는 지우개 덕분에, 연필은 짧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수정의 가능성'**이야말로 '시도'의 가장 큰 동력이 된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수정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우개는 그 무력감을 걷어내는 가장 단순하고 정직한 도구다.




결과적으로 종이 위에 남은 글은 깨끗해 보인다. 그러나 종이를 들어 빛에 비춰보면,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연필 자국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희미한 흔적을 남긴다. 종이의 섬유 깊숙이 스며든 흑연 가루처럼, 우리의 삶에서 완벽하게 지워지는 실수는 없다. 우리는 실수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그 실수의 그림자, 즉 **'희미한 흔적'**은 늘 남아 우리를 따라다닌다.


어떤 이들은 이 희미한 흔적을 보고 다시 새 종이에 쓰고 싶어 한다. '깨끗하지 않아', '완벽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이제 그 흔적이 오히려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 희미한 자국들이야말로 내가 거쳐온 과정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처음 썼다가 버렸던 생각들, 잘못된 방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시도들. 그것들이 겹겹이 쌓여 지금 이 문장들을 만들어냈다.


완벽해 보이는 결과물은,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수많은 수정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주는 희미한 증거들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최종본만 보지만, 우리는 그 지우개 찌꺼기가 쌓인 과정을 기억해야 한다. '얼마나 많이 틀렸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수정하며 끈질기게 지속했는가'가 우리의 진짜 가치다. 연필과 지우개가 함께 짧아지며 소모되는 이 비효율적인 과정이야말로, 삶을 완성시키는 가장 진실한 방식이다. 이 소모의 흔적이야말로 **'진실성'과 '정직한 노력'**을 증명한다.




나는 다시 연필을 집는다. 이번에는 틀려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어차피 지우개는 닳아 없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연필은 짧아지기 위해 깎이는 것이니까. 소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모는 낭비가 아니라, **'현재를 향한 투자'**이며 **'진행형의 증거'**다.


나는 연필을 깎아 뾰족하게 만들 때의 쾌감을 안다. 깎을 때마다 짧아지지만, 그래야 다시 쓸 수 있다. 지우개도 닳아 없어질수록 손에 잡히는 감각이 달라지며, 지나는 길마다 나의 실수를 묵묵히 받아준다. 지워지는 것과 남겨지는 것, 둘 다 의미가 있다. 지워진 것은 사라진 게 아니라, 더 나은 나를 위해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남겨진 것은 한 번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수정의 흔적을 통해 비로소 도달한 현재의 형태다.


당신의 책상 위에도 지우개 찌꺼기가 쌓여 있다면, 그것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라. 그것은 실패의 잔해가 아니라, 당신이 멈추지 않고 계속 쓰고 있다는 노력의 증거다. 오늘도 나는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연필과 지우개가 함께 짧아지며, 비효율적이지만 진실한 방식으로 나의 삶은 완성되어간다. 완벽하지 않지만, 나답다. 그 과정의 모든 소모와 흔적이 나를 만들었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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