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겨울 3편

감귤빛과 말의 리듬, 그리고 저녁의 한 잔



길가에 감귤 상자가 쌓여 있었다.

상자 옆으로 귤 몇 알이 굴러 나와 햇빛을 마시고 있었다.


농장 입구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바구니를 건넸다.

“예쁜 것만 따지 말아요. 예쁜 건 맛이 없을 때도 있지.”


농담을 하며 웃고, 우리는 감귤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가지가 낮고, 열매는 가까웠다.

손끝으로 달콤한 무게가 전해졌다.



첫 귤을 딸 때, ‘딱’ 소리가 났다.

작은 끊김의 소리.


아내가 귤을 반으로 갈랐다.

껍질에서 향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내 입에 한 조각을 넣어주었다.

시고 달고, 아주 조금 쓰고, 다시 달았다.


“여보, 이건 네가 따.”

아내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귤의 위치를 고르던 손끝이 잠깐 머뭇거렸다.

나는 모양보다 빛깔을 보고 손을 뻗었다.


귤을 딸 때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무언가를 예상보다 잘해낼 때가 있다.

유난히 오늘이 그랬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입보다 손이 바빴다.

귤껍질이 손톱에 조금씩 쌓였다.


햇빛에 반사된 귤빛이 아내의 뺨에서 반짝였다.


“예쁘다.”

내가 말했다.


아내는 묻지 않았다.

무엇이 예쁜지.


이 말은 대상을 지정하지 않아도 의도가 분명한 말이었다.

귤, 햇빛, 그녀, 그리고 이 장면.

모조리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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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간단하게 빵과 따뜻한 차로 했고,

우리는 승마장으로 향했다.


넓은 들판에 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웃음이 났다.


직원이 고삐를 쥐여주며 말했다.

“말은 사람보다 천천히 걷기도, 더 빨리 달리기도 해요.

중요한 건 리듬이에요.”


리듬.

아침부터 귀에 익은 단어였다.

우리는 오늘 여러 번 이 말을 배웠다.



아내가 먼저 안장에 올랐다.

숨을 길게 내쉬고 등을 펴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의 어깨가 낮게 흔들렸다.


흔들림에 눌린 이마의 주름이 풀렸다.

나도 뒤따라 올라탔다.


말의 등 위에서 세상이 조금 낮아졌다가,

조금 높아졌다.


고삐를 당기면 세상이 멈추고,

놓으면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같이 가자.”

우리가 한 말이 말에게 닿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바람이라면 알았을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이었는지.



들판 끝에서 말들이 잠깐 멈춰 섰다.

멀리 한라산 능선이 겨울 빛 속에 눕듯이 앉아 있었다.


귤밭의 주황, 풀의 누런빛, 바람의 투명함.


아내가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 잘하고 있어?”

“응. 아주.”


칭찬은 오늘처럼 정확할 때에만 간단했다.


다시 움직일 때, 우리는 리듬이 조금 더 맞았다.


서로의 속도와 말의 속도가,

바람의 속도와 마음의 속도가 겹치는 순간이 있었다.


딱 몇 초.

그 몇 초가 오래 간다.

여운은 길어지는 법을 안다.



오후엔 바다로 내려갔다.

햇빛은 옅어지고, 바람은 단단해졌다.


모래 위 발자국이 금방 지워졌다.

지워지는 걸 아쉬워하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이미 많았다.


사진보다 오래 가는 냄새,

한 번 듣고도 기억되는 소리,

손바닥에 남은 귤향,

승마장 흙먼지의 감촉.


우리는 파도의 마지막 선까지 갔다가,

물이 닿기 직전에 멈췄다.


물이 와서 닿고, 발목까지 적시고, 금방 빠져나갔다.

겨울 바다는 애를 쓰지 않고도 다정했다.



해가 기울자 작은 펍의 간판이 불을 켰다.

우리는 창 쪽 높은 의자에 앉아 생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거품이 잔턱에서 둥글게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첫 모금이 목을 지나갈 때,

오늘의 장면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바구니, 귤빛, 안장, 바람, 파도,

그리고 그녀의 웃음.


“오늘, 새로웠다.”

아내가 말했다.


“우리가 중년에 새로워지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더라.”

나는 대답했다.


“함께 있으면.”


말끝이 거품처럼 부서졌다가 금방 사라졌다.

사라져도 남는 말이 있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 종류의 말.



우리는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저녁 공기가 더 차가워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왔다.


방 안은 낮보다 더 따뜻했다.

라디오를 켰다.


DJ가 청취자 사연을 읽고 있었다.

“오늘 겨울 제주에서 감귤을 따고, 말 위에서 조금 덜 무서워졌다.”


누군가의 문장인데, 우리의 문장이기도 했다.


아내가 이불을 고쳐 덮으며 말했다.

“우리, 내년에도 겨울에 오자.”


미래를 미리 약속해도 괜찮았다.

약속이 우리를 움직이는 건 아니었지만,

약속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천천히 걷게 해준다.


지금을 소비하지 않도록.



잠들기 전에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귤 껍질을 얇게 떼어 탁자 위에 올려놨다.

방 안이 조금 더 달콤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말 위에서 배운 리듬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박자를 세지 않아도,

같은 시간에 멈추고 같은 시간에 움직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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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은 멀리 있지 않았다.

손에 닿는 무게, 발끝의 흔들림,

그리고 한 잔의 거품.

오늘 우리는 다시 처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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