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등지고, 우리를 오르는 일
아침이 숙소의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연필선처럼 또렷했다.
물 끓는 소리와 드립 커피의 향,
창턱에 놓아둔 귤 한 알.
우리는 각각의 컵을 들고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말보다 눈, 눈보다 숨이 먼저 깨어났다.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면, 어디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겠다.”
아내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는 대신,
컵을 들어 살짝 부딪쳤다.
작은 소리가 방 안에 맑게 떨렸다.
오름으로 가는 길은 오래된 길을 닮아 있었다.
굽이굽이, 곁에 누군가 있었던 흔적들.
내비게이션은 간단한 지시를 반복했지만,
발걸음은 나름의 속도를 고집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스크와 목도리를 단단히 여몄다.
바람이 이마를 스치며, 이곳의 겨울 인사를 건넸다.
처음 몇 발자국은 호흡이 빨랐다.
숨이 앞서가고, 다리가 뒤따랐다.
아내가 말했다.
“천천히 가자.”
그 말 한마디로 속도가 낮춰졌다.
천천히 간다는 건,
서로의 리듬을 듣는 일이다.
둘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지 않도록,
다시 맞춰 걷는 일.
잠깐 멈춰 서서 바람을 마주 보는 일.
겨울의 오름은 큰 말이 필요 없었다.
언덕의 경사가 긴 문장처럼 이어져 있었고,
우리는 쉼표마다 잠깐 서서 숨을 고르는 문장이었다.
중턱쯤, 바람이 세졌다.
목도리를 조금 더 끌어올리고, 장갑 끝을 쥐었다.
아내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깨를 살짝 웅크렸다.
그 자세가 낯설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
바람 센 운동장 끝에서 뛰어오던 그 몸짓.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래된 장면이 겨울의 현재와 포개졌다.
“그때, 우리 참 바빴지.”
“응. 그래도 좋았지.”
바람이 대답 대신 뺨을 치고 지나갔다.
얼얼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래된 시간도 이런 식으로 우리를 스쳐갔겠지.
정상에 가까워지자 하늘이 가까워졌다.
바람은 쓸어 올리고, 햇살은 내려앉았다.
낮은 억새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흔들렸다.
우리는 가장자리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아래로 펼쳐진 동그란 분화구,
멀리 이어지는 바다.
풍경은 거대했고, 우리의 대화는 작았다.
“여기까지 잘 왔다.”
“응, 우리 참 잘 걷는다.”
서로에게 해준 칭찬이
마치 오래 준비해온 선물처럼 느껴졌다.
내려갈 때는 올라올 때보다 몸이 가벼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높이에 도착하면
마음이 불필요한 무게를 내려놓기 때문일 것이다.
점심은 뜨거운 국을 골랐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국과 따끈한 공기밥.
겨울엔 뜨거움이 곧 친절이었다.
숟가락이 그릇을 치는 소리,
김치가 접시에 닿는 소리,
내가 국을 떠서 아내의 그릇에 부어주는 작은 동작.
‘수고했어’라는 말을 대신했다.
아내가 “맛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 속에서 ‘괜찮다’와 ‘고맙다’를 동시에 들었다.
오후는 바다 앞 카페에서 보냈다.
창 너머로 파도가 천천히 찍혔다가 지워졌다.
파도는 지우고, 바람은 덧쓰기 했다.
노을이 색연필처럼 바다 위를 칠하기 시작했다.
주황이 분홍으로, 분홍이 보랏빛으로 넘어갈 때,
아내는 작은 노트를 펼쳤다.
빈 페이지에 오늘의 세 단어를 적었다.
‘바람. 천천히. 함께.’
종이를 굳이 채우지 않았다.
빈칸을 남겨야
내일의 말들이 앉을 자리가 생긴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숙소까지 따라왔다.
전등을 켜자 작은 방이 더 따뜻해졌다.
아내가 귤 껍질을 얇게 벗겼다.
라디오에서 오래된 재즈가 낮게 흘렀다.
손바닥의 향기가 방 안으로 퍼졌다.
우리는 침대 모서리에 나란히 앉아 귤 조각을 나눴다.
오늘의 풍경을 오래 붙잡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서두르지 않고, 서로의 속도를 묻고,
같은 시간에 멈추는 일.
잠들기 전에, 아내가 물었다.
“내일은 조금 새로운 걸 해보자.”
“예를 들면?”
“손으로 무언가를 딸 수 있는 일.”
그 말만으로 충분히 설렜다.
내일의 풍경은 이미 귤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