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겨울 1편

바람의 섬에 도착하는 방식



공항 유리벽에 겨울 빛이 번졌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겹치고,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분주한 목소리와 안내 방송 사이로,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아주 작은 속도로 걸었다.

서두르지 않는 도착. 그것이 이번 여행의 첫 계획이었다.


렌터카 창문을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메마른 바람인데 이상하게 포근했다.

바람에 섞인 소금기 때문인지, 오래 전 겨울 바다 앞에 서 있던 우리 둘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처음 함께 바다를 보러 갔던 날, 그날도 이렇게 바람이 셌다.

우리는 젊었고, 서로의 말보다 침묵을 더 많이 믿었다.

말이 서툴러서,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오늘 어디 먼저 가?”

아내가 물었다.


“멀리 아닌, 가까운 데로.”

나는 답했다.


가까운 곳이라는 건, 도착하자마자 앉을 수 있는 자리, 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였다.

커피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몇 분, 아내는 손을 비비다가 창가에 이마를 대고 파도를 봤다.


유리창이 살짝 성에로 흐려졌다가, 그녀의 숨결에 서서히 지워졌다.


“여기 있자.”

아내가 말했다.


계획표를 꺼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로 낮은 햇살이 흘렀고, 커피 표면에 겨울 하늘이 얇게 뒤집혔다.


우리는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함이 손바닥에서 팔꿈치로, 어깨로 올라왔다.

바깥은 차갑게 반짝였고, 안은 느리게 데워지고 있었다.


잠깐 말을 멈추면,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와 에스프레소 머신의 숨, 그리고 주변 테이블의 낮은 웃음.


도시에선 미세한 소음이 불안이 되곤 했는데,

여기선 그 소음들이 다 살이 붙은 풍경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조용히 앉아 있을 때,

비로소 서로의 표정을 오래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오래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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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와 우리는 도보로 바다 가까이 걸었다.

발밑 모래가 겨울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파도는 예의도 체면도 없이 다가왔다가 물러났다.

귓불이 시릴 만큼 바람이 왔고, 그 바람이 내 뺨을 지나 아내의 목도리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오래된 약속을 떠올렸다.

“나중에, 더 나중에도 겨울 바다를 보러 오자.”


우리가 했던 약속은, 알고 보면

‘지금의 우리를 계속 데려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점심은 근처의 작고 조용한 식당에서 먹었다.

유자 드레싱이 얹힌 생선 샐러드, 따뜻한 수프, 바삭한 빵.


특별하지 않아서 좋았다.

특별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의 하루를 든든히 지탱해 왔다는 걸, 한 숟가락마다 되짚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내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안 올릴래.”

그녀가 말했다.


“그냥 우리 둘만 갖고 있자.”


잠깐, 마음이 환해졌다.

공유하지 않을 사진들은 기억을 조금 더 오래 붙잡는다.

시간을 덜 소비하고, 더 저장하게 만든다.


해가 기울 무렵, 우리는 애월의 해안길을 천천히 걸었다.

파도가 옆구리에서 뛰고, 구름의 경계가 분명했다.


아내가 말했다.

“이런 날이면, 내 말이 자꾸 줄어.”


나는 답했다.

“나도.”


우리는 각자의 침묵으로 대화했다.

발걸음의 간격, 서로를 향하는 시선의 높낮이, 괜히 모자를 고쳐 쓰는 손놀림.


언어가 아닌 것들로 내어준 마음이

바람과 섞여 흘렀다.


숙소에 도착하자 창문 너머로 어둠이 서둘러 바다를 덮고 있었다.

난방이 돌아가고, 전기 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창가에 앉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탁자 위 귤을 하나 깎았다.

겉껍질을 돌돌 벗기니, 손끝에 처음 겨울의 향이 붙었다.


귤 한 조각을 서로의 입에 번갈아 넣으면서 우리는 실없이 웃었다.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인데,

여기에서 하면 더 선물이 된다.


장소가 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두르지 않는 방법을 조금은 배우게 된 사람들.

기다리는 데 서툴지 않은 나이.


불을 조금 낮추고, 우리는 같은 담요를 덮었다.

창문에 부딪힌 바람이 유리의 음을 내다가 멈췄다.


아내가 낮게 말했다.

“오늘, 아무것도 안 해서 좋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시간을 보냈느냐가 더 오래 남는다.


하루를 끝내는 방식이 우리라는 사람을 보여준다면,

오늘의 우리는 아주 조용하고 단단했다.


잠들기 전, 내일의 계획을 아주 짧게 확인했다.

“오름 하나, 카페 하나. 그리고 한 끼는 따뜻한 국.”


적어둔 글자가 어둠 속에서 흐려졌다.

눈을 감자 파도 소리가 방 안으로 깊게 들어왔다.


잠과 파도가 반으로 섞였다.

겨울의 첫날이 끝나는 소리였다.


서로의 숨이 일정해질 때까지, 나는 아내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온도가 내일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여행은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 바람이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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