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어다. 마치, 거꾸로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저 밑에서부터, 거꾸로 흐르는 물살을 오르고, 또 오르고, 떨어져도, 또 오르고.
결혼 전 나는 아주 훌륭한 엄마가 될 자신이 있었다. 아이도 한 다섯 명쯤 낳고, 배우자와는 모든 일을 대화로 잘 풀어내며, 돈에 연연하지 않지만 남들 사는 만큼은 사는, 남부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며 ‘신사임당’ 같은 대단한 엄마가 될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10년 넘게 해 온 연극 때문이었다. 연극을 하면서 여러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분석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과 심리학 등에 관심이 높아졌으며, 관련 서적도 나름 자주 찾아 읽었다. 심지어 대학 때 교양 과목으로는 ‘가족 심리상담’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이 수업을 통해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핵심적인 부분들이 머리로 얼추 파악이 되었고 이미 내가 심리상담사 수준의 전문가가 된 것만 같았다. 지금 내 상태는 거의 결혼에 최적화된 상태였다. 이 자신감.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할 수 있다는 이 자만으로 가득 차 있던 상태에서 딱, 마침, 결혼을 하게 되었다. 정말 자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신사임당’이 될 것 같았으면 ‘신사임당’이라는 위인전은 없었을 것이다. 현실은, 실패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2013년에 첫째 아이를 낳았다. 그때 나이가 스물여덟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나이였지만 앞서 말했듯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출산부터가 실패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진단명, ‘아두골반불균형’. 쉽게 말해 골반이 벌어지지 않아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왕절개를 하면 아이를 많이 낳을 수가 없는 것 아닌가.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처절하게 울어댔다. 제발 자연분만으로 낳게 해 달라고 통곡을 했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아이와 나를 위해서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냉정하게 말씀하시고는 방을 나가버리셨다. 내가 목표했던 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가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제왕절개 후 배의 상처가 아무는 고통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젖을 주러 가야 하는데 몸을 일으킬 때마다 의도적으로 갈라놓은 15cm가량의 상처가 온몸을 아프게 했다. 그런 내 옆을 폭주족처럼 쌩쌩 지나가는 자연분만 엄마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속상했다. 배의 상처가 아무는 고통을 핑계로 밤마다 울어댔다. 엄마라는 강물 초입부터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출산 후 3개월부터 나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닥치는 일은 뭐든 했다. 헬스장 인포부터 카드사 인바운드 상담, 세상에서 가장 경멸했던 보험 영업-보험에 대해서 잘 모를 때에는 엄마 말씀대로 보험회사는 도둑놈인 줄 알았다-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무슨 일이든 악착같이 정착해서 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때에는 ‘당당한 직업여성’이나, ‘풍족한 전업주부’ 둘 중 하나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년 후, 둘째가 찾아왔다. 일을 그만 두면 경제적으로 힘들 것 같았지만 그래도 너무 기뻤다. 연년생은 힘들 것 같았지만 옷도 바로바로 물려 입힐 수 있고 또 기타 여러 가지 합리화를 하며 더없이 기뻐했다. 그러나 한 달 뒤 병원에 방문했을 때에는 ‘계류유산’이라는 진단명을 받았다. 이 단어 역시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유산’이라는 단어밖에 안 들렸다. ‘유산’이라니. 제왕절개도 최대 세 명까지는 낳을 수 있다고 하던데. 그 두 번째부터 ‘유산’이라니. 이런 게 바로 ‘청천벽력’이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이 일을 겪고 나니 주변에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계류유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만 이런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바로 다음 해인 15년 6월, 셋째, 지금의 둘째 아이가 생겼다. 또다시 일을 그만뒀고 아이를 출산했다. 출산 후 2개월 만에 또 다른 직업을 구해서 일을 나섰다. 이제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니까. 힘들었지만 괜찮았다. 내 눈 앞에서 꺄르르 웃어 대는 두 살 터울 남매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견뎠다. 꼬물거리던 둘째도 어느덧 땅을 딛고 일어나 자아를 갖고 오물대기 시작했다.
자, 이제 내가 그렇게 자신 있어하던 본격적인 육아의 시작이다.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도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밤마다 소리를 질렀고 아이가 울면 같이 울었다. 아이가 기를 쓰면 나는 더 큰 기를 써서 아이를 짓눌렀다. 가족 심리상담은 개뿔 내가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신사임당은커녕 콩쥐 새엄마의 발톱의 때만도 못했다. 처참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실패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거울 보기가 싫어졌다. 미간에는 인상이 깊게 패여 있고 초점 없는 동공 밑에 꼴 보기 싫은 기미 밭, 두 아이를 수유하느라 대문자 U가 되어 버린 내 가슴과 눈치 없이 빙그레 웃고 있는 뱃살이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보기 싫었다. 그보다 더 마주하기 싫은 것은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직업 하나 없고, 집도 없고, 개똥철학만 가득해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이에게 어쩌구 저쩌구, 아동심리가 어쩌구 저쩌구 위선 떨지만, 막상 애 앞에서 짜증이나 내고 소리나 지르는. 어떤 순간에는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이 이상 발가벗은 나 자신을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 핑계로, 육아가 힘들다는 이유로, 엄마로 살아가기란 참 어렵다는 이유로 매일 밤 술이나 마시며 그 시간만이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히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았고,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아이를 낳고 5~6년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나는 술을 이기지 못하는 편이었다. 집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혼자 앉아 꼴짝 꼴짝 술을 마시다가, 늘 그 작은 테이블 옆에 그대로 누워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었다. 혹시 직장동료들과 한 잔 하게 되는 날이면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왔다. 그 시간이 아니면 나는 언제 또다시 내 시간을 갖을지 모른다, 그 시간이 없다면 나는 불행할 것이다, 이런 이상한 강박에 쌓여 잦은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옆에서 보다 못 한 남편은, 나를 멈춰 세웠다. 지금 하는 일도 다 그만두고, 금주를 하자고 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방법이었다. 우선 지금 일을 그만 두면 수입이 반토막이 날 텐데 그 돈은 어떻게 감당하지? 게다가 금주라니. 과연 내가 술 없이 이 스트레스를 견뎌가며 살아갈 수 있는가? 많이 혼란스러웠지만 남편을 믿고 우선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가난에 허덕이지 않았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니 밖에서 쓰는 돈이 줄고, 내가 일을 하지 않으니 남편과 머리를 맞대어 정신 바짝 차리고 소비를 줄였다. 다음은 금주. 인터넷으로 금주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그중 내가 가장 해 볼 만한 것이, 보건지소에서 진행하는 ‘마음건강검진’ 프로그램이었다. 보건지소에 방문해서 간단한 문진표 작성과 면담 후 내 상태를 체크해서 그 상태에 따라 인근에 있는 가까운 병원을 추천해주고 잘 다니고 있는지, 힘든 부분은 없는지 체크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꽤 심각한 수준이라는 소견을 받게 되었고 가까운 병원에서 3개월 정도, 상담을 받았다.
상담 시간은 약 15분 정도. 더 심도 있는 상담은 비용이 많이 들어서 가벼운 상담만 진행했다. 초회 면담에서는 보건지소에서 했던 문진표보다 더 문항도 많고 종류도 다양한 검사를 진행했다. 그다음 주 듣게 된 결과는 놀랍지도 않았다. 자존감은 낮고 알코올 의존도는 높고. 선생님의 첫마디는 그랬다. ‘어떤 게 가장 힘드신가요?’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내가 너무 싫다고 했다. 죽고 싶다고 했다. 너무 죽고 싶은데 그럴 용기는 또 없어서 죽지 못하는 내 자신이 더 싫다고 했다. 선생님께서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내 이야기를 쭉 들으시고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정말 힘드셨겠네요.’
덧붙여 ‘죽고 싶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는 말의 극단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힘들다.’ 내 자신이, 나에게 계속해서 외쳤던 것이다. 너무 힘들다고. 성공한 엄마가 되기 위해, 남들이 우러러보는 내가 되기 위해, 기준점을 처음부터 산 정상에다 찍어 놓고는, 계속해서 실패했다고만 생각해왔다. 매주 상담을 하며 뒤돌아보니, 이미 나는 출발지점에서 꽤 많이 올라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과거의 실패가 밑거름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전업주부로서 가사와 육아를 꽤 잘 소화해 내고 있고, 육아문제도 늘 남편과 상의해가며 어떤 방향성이 맞는 것인지, 여러 가지 책도 읽어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15년 동안 끊지 못한 술도 단번에 끊고, 남편과 아이들이 맛있다고 칭찬해줄 만큼 요리 실력도 늘었다. 아주 조금, 내가 그리던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과 가까워지는 듯했다.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실패해도 괜찮았다. 실패를 통해서 깨닫고, 배우고, 발판 삼아 한 번 더 오르고. 그렇게 조금씩 오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귀걸이를 만들어서 팔아 보지만 실패, 문화센터 강사 일도 해봤지만 내 소비 대비 수입이 적어 포기, 첫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코로나가 시작되어 입학식도 등교도 불가. 그 전의 나라면 하는 일마다 안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계속해서 도전하는 나 자신을 응원 중이다.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나의 신념과 가치관들이 그릇되지 않았다는 사실 확인이었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 주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나 자신을 신뢰하게 되었다. 나는 참 괜찮다, 나는 참 괜찮은 엄마이자 사람이다, 그런 긍정적인 생각들을 동력 삼아 헤엄쳐 나가는 연어가 되었다. 이제 흐르는 물살을 맞는 일은, 청량한 즐거움이 되었다. 나는 ‘실패를 거꾸로 오르는 힘찬 연어’가 되어 반드시 정상에 오를 것이다. 그 정상은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 것이고, 그러므로 내 인생의 끝은 반드시 ‘성공’으로 마무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