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고통, 나의 고통.
내 결혼의 고통은 남편과의 마찰이 아니었다.
친정엄마와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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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장만한 집은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오래된 빌라였다. 언덕도 어찌나 높은지 유모차 한 번 끌고 올라가려고 하면 거의 지면과 수평이 될 정도로 엎드려야 했다. 하지만 결혼에 성공했다는 행복감에 쌓여 그런 고통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물여덟살이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행복했다. 뱃속에서 바둥대는 내 첫째 아이가 빨리 보고 싶기도 했고, 사랑하는 남편과 매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은 공존하니까, 내 행복은 남편과 단 둘이 있을 때뿐이었다.
엄마는 나를 힘들게 키우셨고, 힘들었던 만큼 기대감이 높으셨다. 그 기대에 비하면 지금 내 생활은 엄마에겐 억장이 무너질듯한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화가 되어 매일같이 쉬지 않고 남편과 나에게 날아왔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눈 비비고 나오는 남편에게 빨래통에 빨래 좀 잘 넣어라, 변기에 소변볼 때 신경 써라, 야, 너, 얘, 쟤는 기본이고 남편을 쳐다보는 눈빛은 단 한 번도 곱던 적이 없다. 늘 볼에 경련이 일어났고 미간에는 인상이 가득했다. 정말 무서웠다. 처음 같이 살게 된 몇 달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 태도가 1년, 2년.. 계속될수록 엄마와 나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뱃속에 아이를 가진 채로 몇 번을 엄마와 싸웠는지 모른다. 엄마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나는 답답했고, 벽에 머리를 박고, 바닥을 뒹굴고, 가구를 발로 차고.. 내 말을 들어 달라고 악을 쓰고 발악을 해도 엄마는 변함이 없었다. 늘 사위를 무시했고, 나를 한심하게 여겼다. 마음이 굳게 닫혀 있으니 수없이 오해도 했다. 예를 들어 ‘어머님, 이것 좀 드세요.’라고 남편이 말하면, 엄마는 나중에 가서 이렇게 재연한다.
(그릇을 탁 던지며) “어머님! 이것 좀 드세요!”
내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지신랑편든다, 저게 싸가지가 없다, 말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한다는 둥 욕이 바가지로 날아왔다. 엄마는 소통할 의사가 없었고,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3세대나 건너뛴 엄마와 나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엄마의 시대와 내 시대는 너무 달랐고, 서로를 이해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의사소통이 필요한데, 기본적인 대화부터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우리는 늘 평행선이었다.
그렇게 첫 집에서 2년을 살고, LH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을 이용하여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번엔 보증금 7천만원짜리 집이었는데, 이 집 역시 언덕길 끝에 있던 집이었으나 그 전 집보다는 경사가 완만하여 다니기가 좀 더 수월했다. 그 집에서도 엄마와 나의 마찰은 계속되었다. 그 당시 우리 차는 시어머님께서 주신 ‘스파크’였는데, 하루는 엄마와 또 크게 한 판 싸우다가 뛰쳐나와서는 갈데가 없어 집 앞에 있던 차 운전석에 앉아 펑펑 울었다. 누구에게 전화해서 하소연하자니 이 고통을 받을 상대방이 너무 힘들 것 같았고, 혼자 짊어지자니 너무 무거웠다. 그때가 결혼한 지 3년쯤 됐을 때인데, 3년, 약 1,000일을 엄마와 계속해서 싸우다 보니 엄마도 나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너무너무 행복했는데, 엄마는 아니라고 한다. 자꾸 내가 불행하다고 하고, 남편이 밉다고 한다. 그런데 그 총알을 받는 남편은 또 나에게 말이 없다. 그것도 슬펐다. 그렇게 엄마한테 상처 받았으면, 나에게 화풀이라도 하지, 남편은 그저 묵묵히 삭히기만 할 뿐이었다. 멀리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지금 당장 시동을 켜고 그 아파트 단지에 가서 아무 아파트나 들어가서 옥상에 올라가고 싶었다. 소주를 두 병 정도 사가야 하나 고민했다. 진심이었다. 더 이상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와 이렇게 계속 같이 살면계속해서 괴로울 것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혼자 둘 수는 없다. 연세가 많으시니까.. 방법이 없다. 출구가 없다. 희망이 없다. 살아갈 힘이 없다. 힘이 든다. 이번 삶을 포기하고 싶다. 수도 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성이 남아 있어서, 나 없이 살아가야 할 남편, 아이들, 그리고 그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애 먼 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시 지옥불에 제 발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새까맣게 타서 재가 된 상태로, 그렇게 그 집에서 또 2년을 살았다.
그 후로도 마찰은 계속되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남편도. 그리고 아이들 정서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선택해야 했다. 우리 부부는 고심 끝에 엄마 방에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엄마, 우리 따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