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부터 해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는 생겼고 배가 더 나오기 전에 식을 올려야만 했다. 넌 돈을 얼마나 모았냐, 집은 어떻게 할 거냐, 예물, 예단은 난 꼭 이런 걸 받아야만 한다는 계산 따위 할 새 없이 당장 발등에 불부터 꺼야 했다.
우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하고 가까운 친정엄마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엄마는 깐깐한 서울 할머니 스타일이신데, 1941년 1남 3녀의 맏딸로 태어나 6.25 전쟁도 겪으시고 세 명의 동생들을 돌봐오시다가 늦은 나이에 아빠를 만나 결혼하여 단칸방에서 마흔 셋에 딸 하나 낳고 외벌이로 혼자 열심히 일하셔서 서른 세 평 아파트까지 갔지만, 남편도 잃고 IMF로 집도, 가게도 잃고 다시 월세방 신세가 되면서도 내 딸은 잘 되길, 내 딸은 꼭 성공하길, 그저 자식새끼 하나 잘 되기만을 바라보고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런 딸아이가 스물여덟,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채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며 어느 고급진 뷔페에서 인사를 시켜준다. 나는 드라마에나 나오는 것처럼 이 결혼은 반대라며 물 뿌리고 나가실 줄 알았는데, 이건 드라마가 아니었으니 엄마는 교양 있게 사위 인사 받으시곤 이 결혼을 승낙하셨다.
다음으로 시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천안으로 내려갔다. 남편의 먼 사촌의 결혼식에서 첫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결혼식을 다 지켜보고 뷔페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제대로 앉아 인사드릴 수 있었다. 어머님 역시 불쾌함 없이 나를 인정해주시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대화 없는 어색한 식사가 끝나갈 즈음 어머님께서는 나에게 하얀 봉투를 건네셨다. 꽤 두툼한 봉투였다. 그 하얀 봉투를 건네받으며 어머님과 손을 맞잡게 되는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분명 슬픈 건 아니었는데, 그 하얀 봉투를 통해 느껴지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 이후의 모든 미션들도 정말 착착 진행되었다. 예식장은 비수기인 겨울에 결혼을 해서인지 정말 좋은 곳에서 할인을 받아 저렴한 가격에 준비할 수 있었고, 예산이 안되니 스튜디오 촬영은 쿨하게 패스. 스냅사진은 남편의 친척분에게 지인 찬스, 메이크업은 내 친구에게 부탁하여 이름 있는 샵에 예약했고, 드레스는 그 샵의 디자이너의 지인 찬스. 뭐 이렇게 아름아름 연결해서 여러 번 고민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진행했고, 예물 예단은 생략했으니 더 이상 준비할 게 없었다. 룰루랄라 혼인신고까지 둘이 가서 하고, 집은 부동산 앱 보며 가장 저렴한 곳으로 구하고.
이렇게 일이 잘 풀리니 지금까지 겪었던 시련, 고통, 슬픔, 그 모든 불행들이 남편과 결혼하기까지의 어떤 험난한 과정이었고, 이제 나에게는 우상향 인생만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