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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_결혼

철 모를 때, 아무 생각 없을 때.

by BOM



스물여덟이라는 나이가

얼마나 철없고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고

얼마나 겁이 없는 나이인지를

8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았다.



-



뭐부터 해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는 생겼고 배가 더 나오기 전에 식을 올려야만 했다. 넌 돈을 얼마나 모았냐, 집은 어떻게 할 거냐, 예물, 예단은 난 꼭 이런 걸 받아야만 한다는 계산 따위 할 새 없이 당장 발등에 불부터 꺼야 했다.


우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하고 가까운 친정엄마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엄마는 깐깐한 서울 할머니 스타일이신데, 1941년 1남 3녀의 맏딸로 태어나 6.25 전쟁도 겪어 보고 세 명의 동생들 뒷바라지하다가 늦은 나이에 한 남자와 선을 보게 되었는데. 남자 얼굴 한 번 쳐다보기 부끄러워 어떻게 생겼는지도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 남자의 구애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웬걸. 이 남자는 사고로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 었던 것(어떻게 다리 저는 것을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는지, 이 스토리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여하튼). 결혼해서도 마음 놓지 못하고 가장 노릇도 하고 집안도 살피며 마흔셋에 딸 하나 낳고 열심히 일해서 서른 세 평 아파트까지 갔지만, 딸내미는 사춘기 왔다고 지랄을 일삼고 남편은 허권날 집에서 술이나 처먹다가 결국 치매까지 앓게 되어 일하면서 남편 병간호도 하면서 딸내미 사고 치면 그거 수습하러 뛰어 정말 밤낮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IMF가 뭔지 그 일로 집도, 가게도 잃고 다시 월세방 신세가 되면서도. 유일한 희망. 내 딸은 잘 되길. 내 딸은 꼭 성공하길. 그저 자식새끼 하나 잘 되기만을 바라보고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런 딸아이가 스물여덟,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채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며 어느 고급진 뷔페에서 인사를 시켜 주는 것이다. 나는 드라마에나 나오는 것처럼 이 결혼은 반대라며 물 뿌리고 나가실 줄 알았는데, 이건 드라마가 아니었으니 엄마는 교양 있게 사위 인사받으시곤 이 결혼을 승낙하셨다.


다음으로 시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천안으로 내려갔다. 남편의 먼 사촌의 결혼식에서 첫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결혼식을 다 지켜보고 뷔페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제대로 앉아 인사드릴 수 있었다. 어머님 역시 불쾌함 없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셨다. 나중에 들었는데 사실 어머님께서도 아주 벼르고 계셨다고 한다. 어떤 여우 같은 년이 내 순진한 아들 꼬셔서 덜컥 임신부터 해가지고 온담? 아주 근본 없고 발랑 까진 년이면 어쩐담? 하고. 그런데 내가 저기 멀리서 들어오는데 그런 걱정이 싹 없어졌다고, 어머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나는 당시에는 그런 어머님의 속마음까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래도 '혼전임신'이란 중대한 사고를 친 것과 다름없으니 잘못했다는 바이브를 잔뜩 품고 어머님을 뵈었던 것 같다. 대화 없는 어색한 식사가 끝나갈 즈음 어머님께서는 나에게 하얀 봉투를 건네셨다. 꽤 두툼한 봉투였다. 그 하얀 봉투를 건네받으며 어머님과 손을 맞잡게 되는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분명 슬픈 건 아니었는데, 그 하얀 봉투를 통해 느껴지는 무언가가, 꽤 여러 가지 감정의 뭉텅이가 가슴에서 울컥 올라왔다.


그 이후의 모든 미션들도 정말 착착 진행되었다. 예식장은 비수기인 겨울이라 좋은 곳에서 할인까지 받아가며 저렴한 가격에 계약을 했고, 예산이 안되니 스튜디오 촬영은 쿨하게 패스. 스냅사진은 남편의 친척분에게, 메이크업은 내 친구에게 부탁하여 이름 있는 샵에 예약했고, 드레스는 그 샵의 디자이너의 지인에게. 뭐 이렇게 아름아름 연결해서 여러 번 고민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착착착 진행되었고, 예물 예단은 생략했으니 더 이상 준비할 게 없었다. 룰루랄라 혼인신고까지 둘이 가서 하고, 집은 부동산 앱 보며 가장 저렴한 곳으로 구하고.


이렇게 일이 잘 풀리니 지금까지 겪었던 시련, 고통, 슬픔, 그 모든 불행들이 남편과 결혼하기까지의 어떤 험난한 과정이었고, 이제 나에게는 우상향 인생만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나는, 결혼이 '끝'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결혼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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