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우선한다

다시 오는 국가자본주의 시대

by 세르반다

2000년대에는 국가의 기능이 축소될 것이라는 환상, 기대, 또는 두려움이 있었다.


누군가는 EU 같은 초국가적 연대체를 꿈꿨고,

누군가는 정부권력을 압도하는 다국적 거대 기업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상했으며,

또 누군가는 국가가 해체되고 소규모 지역공동체들이 자급자족하는 세상을 꿈꿨다.


20년이 지난 지금, 국가는 다시 가장 강력한 조직이 되었다.

아니, 사실 국가는 한 번도 강력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그 권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 경쟁 속에서 권력이 다시 시장에서 국가로 옮겨가고 있다.

국가자본주의 2.0이라고 해도 무방한 시대가 오고 있다.


국가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단순히 기업을 규제하는 수준을 넘어서, 기획자이자 투자자로서 직접 시장을 주도하는 체제로서, 생산수단(기업)을 소유하거나 통제하며, 자본 축적과 투자 결정을 시장의 자율성이 아닌 국가의 정치적·전략적 목표에 따라 내리는 경제 시스템을 말한다.


한국인은 국가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잘 안다. 경제개발기의 한국이 국가자본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기 때문이다.


개발독재 시기 한국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으로 불릴 정도로 정부 주도로 경제를 운용했다. 경제기획원의 주도 아래 재무부는 기업에 자금을 조달했고, 상공부는 기업들에게 연구개발 분야, 생산 품목, 수출목표를 설정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들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전자생산부", "자동차생산부"로서 기능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치독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도 유사한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자본축적이 된 후에는 시장의 자율성에 경제적 결정을 넘기는 방식으로 국가자본주의를 종결했다. 그래서 개발경제학(Development Economics)에서는 국가자본주의를 축적된 자본이 부족한 개발도상국들의 과도적 정책으로 보았다.


"시장이 국가보다 똑똑하다"는 인식을 전제한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미국과 서유럽은 정부가 특정 산업을 육성하거나 보조금을 주는 산업정책이 시장의 효율적인 자원배분 기능을 왜곡하고 비효율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서방진영에서 산업정책은 구시대의 산물로 여겨졌다.


지정학적 불안과 경제안보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도 국가자본주의를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제도 및 기술을 활용해 통제를 더 강화했다. 중국이 첨단기술과 군사기술을 전략적으로 육성했고, 러시아는 저렴하고 풍부한 에너지로 유럽의 목줄을 쥐었다.


유럽은 침체되어 가는 산업과 러시아의 위협 앞에 드러낸 무기력에 위기감을 느꼈다. 미국은 중국이 기술패권과 군사패권에 도전해 오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윤만을 추구할 뿐 국가의 안보를 신경 쓰지 않는다. 싸다면 중국산 통신기기든, 러시아산 에너지든 가리지 않는다. 유럽의 자동차기업들과 애플은 거대한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중국정부에 굴복해 기술을 내주고 고집스럽게 지켜오던 데이터 보호 정책들도 폐기했다.

서방진영도 더 이상 시장에만 경제를 맡겨둘 수 없음을 자각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안보의 개념이 부상했다.

경제적 수단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고, 반대로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경제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대외적인 경제적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핵심 산업과 국민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과제가 국가에게 주어졌다.


현대 국가들에게 중요한 경제안보적 과제는 다음과 같다.


공급망 회복력 (Supply Chain Resilience):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리튬, 희토류 등)처럼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품목을 특정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도록 다변화.

기술 주권 (Technological Sovereignty): AI, 양자 컴퓨팅, 차세대 통신 등 미래 패권을 결정지을 첨단 기술을 자국이 보유하거나 확실하게 통제. 단순한 산업 경쟁력을 넘어 국방 및 첩보 능력과도 관련 있음.

에너지 및 식량 안보 (Energy & Food Security): 자원 무기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쟁이나 외교적 갈등 상황에서도 에너지(천연가스, 원자력 등)와 식량을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경제적 강압 대응 (Countering Economic Coercion): 특정 국가가 정치적 갈등을 이유로 경제적 보복(수출 제한, 불매 운동 유도 등)을 가할 때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제도적·외교적 방어막을 구축.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본은 2022년 경제안보추진법을 제정했고, 유럽은 반도체, 배터리 등 각종 전략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산업정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자유시장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미국은 틱톡의 지분을 강압적으로 매각하도록 하고, Chips Act로 국내에 공장을 짓는 반도체 기업에 큰 보조금을 지급하며, 일본제철이 US스틸을 인수할 때 미국정부가 황금주를 갖고 경영에 간섭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국가의 시장 개입을 크게 강화했다.


한국은 다른 서방국가들보다 앞선 2010년대에 사드 사태로 촉발되었던 중국의 한한령(2016)과 일본제철 강제징용 배상판결로 인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2019) 등 다양한 경제안보 위기 사태를 거치며 경제안보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기도 전에 일찍이 공급망 회복력을 구축해 왔다. 하지만 포괄적인 경제안보 체제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 특히 점점 더 중요해지는 IT/데이터 안보에 대한 고려는 미진한 수준이다.


국가자본주의 2.0: 국가의 역량이 중요해진 시대


트럼프 정부의 관세전쟁은 경제안보가 중요해지는 흐름 속에서 정점에 위치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제 국가와 시장경제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는 또 하나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별개의 영역처럼 여겨져 온 외교안보전략과 경제통상전략은 하나가 되었다. 기업들이 각자도생, 각개격파해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 기업들 스스로도 세계 무대에서 기업의 국적이 중요해진 시대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국가의 역량이 유례없이 중요해졌다.

국가는 이제 크고도 디테일한 기획을 수립하고 주도적으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나아가야 할 거시적인 방향과 전략을 세우고, 실행가능하도록 디테일하게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공 영역에 인재가 더 필요하고, 공공과 민간이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산업의 복잡도가 높아진 현실을 고려하면 공공과 민간 영역 사이의 인적 교류가 앞으로 더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


케케묵은 이념 논쟁 프레임에서 벗어나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집중해야 한다.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권위주의적 국가자본주의" 국가이지만, 공산주의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국이 대한민국에게 경제적/안보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영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대응할지 결정해야 한다.


현재 국제질서가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하는 것은, 같은 진영을 무조건적으로 지원하고 챙겨주던 냉전시대와도 다르다는 점이다.

트럼프 정부는 관세전쟁에서 오히려 동맹들을 더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주요 안보 위협을 상정하고 중국을 패권 경쟁의 상대국으로 보면서도, 중국과 러시아의 역내 영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려는 태도도 보이고 있다. 현재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생각하는 그들의 영향권이 서로 겹치기 때문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열강들이 각자도생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하던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더 유사하다. 힘겨루기를 통해 서로의 힘을 어느 정도 확인하고 나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세계를 분할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분할했던 것처럼, 강대국들이 당사국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서로의 영향권을 합의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느 패권국의 영향력에 속하게 될지를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절박한 심정으로 정부의 역량을 키워야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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