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 논란에 관하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지방 이전 논란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이 담론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AI 경쟁력 강화와 지역 균형 발전, 전력망 확충과 탄소 중립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과제들이 첨예하게 충돌하며 하나의 프로젝트에 집약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이 격렬한 논쟁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무한히 확장될 것만 같았던 디지털 세계 역시 유한한 아날로그 세계의 한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냉철한 사실입니다.
스마트폰은 어디서든 물리적 제약 없이 우리를 인터넷이 제공하는 무한한 정보의 바다로 연결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터넷의 물리적 실체를 감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글이나 넷플릭스 같은 해외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수천 킬로미터의 해저 케이블과, 대한민국 곳곳에 설치된 광케이블 및 무선 기지국, 그리고 서버로 가득찬 데이터센터들이 필요합니다. 해저케이블에 문제가 생기면 잠수부가 직접 들어가 수리하기도 하죠.
AI도 예외가 아닙니다. AI를 구동하기 위해서는 GPU와 HBM 메모리 등 반도체로 가득한 데이터센터가 제공하는 어마어마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합니다. 데이터센터를 구동하기 위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엄청난 양의 전력과 냉각을 위한 용수가 공급되어야 하죠.
AI의 성능이 향상되고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AI가 소비하는 전력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AI 가동을 위해 계획 중인 데이터센터는 1GW(기가와트)급 전력 소모를 기본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1GW는 원전 1기의 발전량으로, 경기도 수원시 인구와 비슷한 약 120만명이 동시에 사용하는 전력량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AI 알고리즘을 개발해도,
반도체가 없으면, 전력이 없으면, 물이 없으면,
모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AI의 빠른 발전 속도를 전력 공급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전력이 AI 발전의 병목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건스탠리는 2028년까지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이 최대 20%까지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반면, 중국은 이미 2023년 기준 미국보다 발전설비용량과 발전량이 모두 2배 이상임에도, 연간 약 429GW의 발전량을 추가하고 있어 추가발전량에서도 51GW 씩 증설하고 있는 미국을 크게 압도하고 있습니다.
2021년 전력부족 사태를 겪었던 중국은 원자력, 태양광, 풍력, 석탄, 가스 등 가용한 모든 발전원을 활용해 발전량을 늘리는 한편,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확충하며 전력 안정성도 확보해나가고 있습니다. 발전량은 2030년까지 2024년의 두 배, 에너지 저장용량은 2027년까지 두 배로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2030년 목표였던 1,200GW를 2024년에 조기달성하며 현재는 전력이 남아도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미국은 민영화된 전력시장 구조 아래에서 시장수요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발전용량을 증설하다보니 중국보다 전력증설 속도가 훨씬 느린 상황입니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전력 인프라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상당 부분 잃어 변압기와 전선을 생산하는 독일과 한국 같은 동맹국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골드만삭스는 최근 12월에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전력 공급 부족(Power Crunch)으로 인해 중국에 AI 패권을 빼앗길 수 있다면서, 경직된 미국의 전력망에 비교하여 중국의 잉여 전력과 빠른 인프라 구축 능력이 AI 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심지어 前 미국 공군 최고소프트웨어책임자(CSO) 니콜라스 체일런(Nicolas Chaillan)은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미국은 이미 패배했다. 중국과의 AI 전쟁은 이미 끝난 게임(Done Deal)
이제 AI 패권 경쟁은 알고리즘 경쟁이 아니라, 반도체 설계 및 생산, 데이터센터 건설, 전력 및 용수 공급 인프라, 데이터 안보와 금융까지 아우르는 총력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Winning the Race(경쟁에서 이기기)”라는 제목의 AI 발전계획까지 수립하며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미국에게 반도체 제조능력과 전력 인프라 생산 능력을 가진 한국은 중요한 동맹국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글로벌 AI 패권경쟁의 격랑 속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문제는 단순히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키운다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이는 각자도생의 세계로 변화한 국제정치 환경에서, 대한민국의 지위를 결정할 전략자산을 어떻게 배치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질문이 됩니다. 따라서 경제적 효율성 만큼이나 국가 차원의 경제안보적 고려가 필수적입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지방 분산 배치 논의는 현재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력 공급입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가동을 위해서 삼성전자는 9GW, SK하이닉스는 6GW의 전력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RE100 목표까지 고려하면 원거리 발전지역(호남, 강원 등)에서 수도권까지 국토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송전선 건설이 불가피합니다. 이 과정에서 송전선이 건설되는 지역에서 수도권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반대가 빗발치고 있고, 변전소가 위치한 경기도 하남시는 변전소 증설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를 일치시키는 '지산지소(地産地消)' 원칙을 내세워 송배전 손실과 지역 갈등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과, 국가 차원의 전력망을 조속히 확충하여 기업이 원하는 곳에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습니다.
둘째는 수도권 집중 및 지역균형발전입니다. 첨단 산업의 수도권 집중은 이미 심각한 수도권 집값 폭등과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이 수도권의 '에너지 식민지'가 되었다는 불만까지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이에 반도체 산업 같은 고급 일자리가 지방에 분산 입지해야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방 소멸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과, 고급 인력 유치와 사업 편의성을 위해 수도권 입지를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관점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의 생존을 결정하는 전략자산이 된 이상, 안보적 고려를 최우선으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우리에게 중요한 시설은 곧 적국에게는 주요 타격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며, 특정 지역의 전력망 불안에도 반도체 생산이 흔들리지 않도록 물리적 분산 배치 방안을 고민할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북한의 위협 아래 대한민국 정부는 경제개발기에 구미, 포항, 울산, 창원 여수, 광양 등 남부지방에 산업단지를 집중 조성했고, 서울의 한강 이남을 개발했으며, 충남으로 수도를 이전하려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TSMC가 곧 국가 안전보장 수단인 대만은 전략적으로 TSMC 시설을 전략적으로 전국에 분산 배치하였습니다. 본사와 연구개발시설은 타이베이와 가까운 신주과학단지에 위치하도록 하되, 생산시설은 수도권과 중부, 남부에 고르게 나누어 배치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산 전략은 적국의 공격이나 대규모 지진으로 인해 단일 지역이 피해를 입더라도 전체 생산 라인이 마비되는 사태를 막고, 전력 및 용수 공급 인프라가 특정 지역에만 과도하게 집중되는 부담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엄혹한 지정학적 현실 앞에 경제적 효율성 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제는 경제안보가 곧 산업경쟁력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논란은, 무한한 확장을 약속했던 디지털 문명이 결국 유한한 아날로그 자원(전력, 용수, 국토)의 한계에 종속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현주소입니다. AI 패권 경쟁이 단순한 알고리즘 싸움을 넘어 '에너지 총력전'이 된 상황에서, 이 프로젝트는 AI 강국으로의 도약과 지역 균형 발전, 탄소 중립이라는 국가적 난제들이 집약된 시험대입니다.
이 복잡한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제 논리를 넘어, '경제안보'를 새로운 축으로 삼는 전략적 사고가 필수적입니다.
반도체 시설을 적국의 위협이나 자연재해로부터 보호하고, 전력 인프라의 부담을 분산하며, 지방에 새로운 성장 거점을 마련하는 전략적 분산 배치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국가의 백년대계를 결정하는 숙명적 과제입니다.
대만의 TSMC 사례가 보여주듯, 우리는 단기적 효율성을 넘어 장기적인 생존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배치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AI 3대 강국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기 위한, 현실에 뿌리내린 디지털의 꿈을 실현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인간:지능연구소 H:AI의 뉴스레터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