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이들의 무지개 그림, 조용한 골목을 접수하다
브랙퍼스트 브리핑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의 대화를 주의깊게 듣던 큰 아이는 이제 아침식사 시간마다 묻는다. "엄마, 오늘은 보리스가 뭐래?" 학교를 닫아준(?) 보리스 존슨은 이제는 거의 친한 친구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 날은 특별한 뉴스가 있었다. "이제 몇 미터 떨어져서 대화 나누던 친구들과도 못보겠네." 남편이 말했다. "어제 저녁에 보리스 존슨이 룰을 강화했어. 장보기와 운동만 하루 1회정도로 제한하고, 가족, 친구들도 만나지 말라고. 어길시에는 경찰이 개입해서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대 "이번 주말은 어머니의 날인데?" "뭐, 보리스 존슨도 어머니 보러 안갈거래. 그게 진정 어머니를 위한거래"
지금 우리는 '컨택리스'
"안되는게 또 뭐야?" 격리생활이 아직도 어색한 요즘, 뭔가를 하려다가, 일일히 묻곤 한다. "피자는 시켜도돼?" 되지만 배달은 비접촉으로 한단다. 슈퍼마켓에서는 서로 2미터 떨어져야 하다보니, 좀 좁은 슈퍼마켓에서는 마치 어린시절 놀이라도 하듯이, 아니 인디언 의식이라도 하듯이 수퍼 안을 큰 원을 그리며 줄서서 쇼핑을 한다. 지루해도 정신 바짝 차려야한다. 지나치고 나면 깜빡 잊은 품목이 있어도 돌아갈길이 없기 때문이다.
계산대에서도 새로운 룰이 생겼다. 물건을 계산대에 놓고 재빨리 2미터 뒤로 가서 기다렸다가, 현금이 아닌 카드로 계산하고, 직원이 계산대에 물건을 놓아주면 얼른 들고 사라지면 된다. 간혹 잘 이해하지 못하고 "뭐라구요?" 계속 다가가는 손님들은 "뒤로, 뒤로 가라고요" 한 소리 듣게 마련이다. "불편하시죠? 안타깝네요." 직원이 단골손님인 듯한 할머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에고, 어쩔수 없죠. 이게 유일한 방법이니까."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간 마스크를 보유하거나 상용해보지 않은 영국의 일상에서, 할머니도, 나도, 직원들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때다. 좀 힘들지만, 일상을 배우고 적응해야 한다.
이웃과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게 끊긴지 몇일이 지나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금씩 왕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장보고 오는 길에, 예전같으면 선물이라 할 수도 없었던 소중한 오이나 계란 몇알을 친구들의 집 앞에 놓고 오기도 한다. 이웃들은 창 밖으로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손을 번쩍 들고 흔들어 '생사확인'을 해주었다. '하우스파티'라는 앱으로 엄마들끼리 시간을 정해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아이의 방에서 한시간째 흘러나오는 귀여운 수다 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도 왠지 기분이 흐뭇했다. 동네 작은 레스토랑과 가게에서는 전단지를 통해 소식을 전하고 상황을 전했다. "우리 가게는 수요일과 일요일에 점심 배달서비스를 하기로 했습니다. 동네의 작은 가게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부작용?
그러다보니, 이상현상도 생겨났다. 투둑, 하고 레터박스에 뭔가 오면, 평소에 관심없던 아이들이 몰려들어 뭐지 뭐지 하고 쭈그려 앉아 들여다본다. 배송이 오면 다같이 문간으로 나온다. 아이들이 손님이라며 반가워하며 웃고 서 있으면 비접촉 배송을 하는 배달기사분들도 손을 흔들어주고 갔다. 부스럭 부스럭, 큰 아이가 키친에서 간식을 몰래 가져가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냥 가만히 앉아있다. "우리 앞집도 지금 좀 안좋은거같아.."눈부시게 밝은 날, 아이들과 밖을 바라보던 남편이 말했다. "갑자기 마당에 크리스마스 불빛을 켰어."
평소라면 새벽부터 출근하고 얼굴 보기 힘들었던 앞집 엄마는, 햇빛이 조금 시원한 오후가 되자, 아예 집 앞 공간에 의자를 가지고 나와 진을 차렸다. 세 딸은 분필을 가지고 뭔가를 그리고 조용히 장난을 하며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잠시 후, 우리도 장보러 나가려 집을 나왔을때, 앞집 아이들이 들어간 자리에 커다란 무지개와, 세 장의 색색 예쁜 무지개가 붙어있는 것을 봤다. 색색깔 정성을 다해 그린 무지개 그림을 눈으로 보니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래, 일상이 회복되겠지. 다들 고생하지만, 아이들도 이렇게 잘 견디고 있다. 그동안, 역사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비가 왔고 홍수가 넘치기도 했지만, 우리는 항상 견뎌내었고, 결국에 무지개를 보았으니까.
너무나, 너무나 강한 전염성
그제서야, 서로를 응원하고 희망을 나눈다는 의미로 아이들이 무지개그림을 붙이고 있다는 기사를 본 것이 기억났다. 이렇게 골목마다 퍼져나가는 무지개 그림을 두고, 영국 엄마들의 웹사이트인 멈스넷mumsnet에는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창문에 무지개를 붙이지 마세요. 최근 몇년간, 무지개는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부정적으로 규정짓는 억압의 상징이 되었어요. 우리 골목에서만,무지개 그림을 벌써 몇개나 봤어요. 정말 기분나쁘네요. 이렇게 생각하는것, 비상식적인가요?" 라는 글에 대해, 찬성도 있었지만 이와 반대하는 의견은 92퍼센트를 이루었다. "지금 그걸 기분나빠할 시간이 있다면, 운이 좋은 줄로 생각하세요."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에요. 우리집 아이들이 지나가는 개나 장보러 가는 사람들을 기분좋게 해주려고 무지개든 뭐든 그린다면, 얼마든지 그리라고 할거에요."
나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오래 고민할 시간도 없이, 우리 골목에도 무지개가 전염되기 시작했다. 옆집 여자아이도, 우리집 아이들도 열심히 작업을 해서 창문에 걸어두었다. 두살짜리 작은 아이는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 오려둔 종이를 하나씩 붙이느라 얼굴에 온통 풀이 묻고, 큰애는 나름 "나는 추상적인 무지개야." 골목의 다른 아이들과 차별화를 꾀했다. 뭔가 메세지를 쓸까 고민하던 아이는, 한동안 가지 못한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 구절 하나를 썼다.
어떤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는 행동도 아닐것이다. 그저 아이들을 잠시 바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액티비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조깅하는 길에 높다란 창문에 저마다의 스타일로 열심히 그린 무지개를 보면, 미소를 띠게된다. 다들 집에 있지만, 서로 생각하고, 케어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마음인것 같아서.
생각해보면 전세계 우리 모두, 참 이상한 일상을 겪고 있다. 영국은 모든 스타벅스가 문을 닫았고, 하루 두번 정도 햇빛을 쏘일 수 있다. 장 볼때마다 달걀 득템하지도 못한다. 웃으며 지나쳐 보려하지만, 억누르고 있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서로 얼굴 보고 웃고, 같이 커피마시고 밥먹는 것은 미룰 수 있지만, 응원하고 나눔으로써 나 자신보다 더 큰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