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

단편소설

by 박현수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 진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는 담임 선생님의 책상 밑에 납작 엎드린 채 숨죽이고 있었다. 방금 교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우리가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건 순전히 사소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쉬는 시간에 우연히 열려 있던 담임 선생님의 노트북 화면이 눈에 띄었고, 나는 “혹시 시험 문제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슬쩍 들여다보았다. 진우는 처음에 “야, 이러다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하며 만류했지만, 결국 나를 따라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그때 우리는 보고 말았다. 화면에는 ‘2학년 3반 중간고사 수학시험지’라는 파일이 첨부된 이메일 창이 떠 있었다. 보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담임 선생님이었고, 수신인은 ‘강민규 학부모’로 적혀 있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선생님이 중간고사 문제지를 민규의 부모님께 보내고 있었다니,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넋을 놓은 것도 잠시, 복도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돌아오신다!” 진우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끌어당겼다. 우리는 재빨리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동시에 교무실 문이 확 열리며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진우와 몸을 바짝 붙인 채 한 덩어리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혹시 우리의 숨소리를 들을까 봐 가슴이 조여 왔다.

선생님은 노트북 앞의 의자를 끌고 앉았다. 우리 코앞, 책상 바로 위에서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공포에 질려 진우와 눈을 마주쳤다. 진우의 얼굴도 창백했다. ‘제발 우리를 못 보시길…’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한참 동안 선생님이 자리를 떠나지 않아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가 저려 왔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복도에서 누군가 “김 선생님! 급히 좀 와보세요!” 하고 불렀다. 담임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 지금 나갈게요!”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선생님은 노트북 화면을 닫을 겨를도 없이 서둘러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도 우리는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혹시나 다시 들어올까 봐 서로 눈치만 살폈다.

조용해진 복도를 확인한 뒤에야 우리는 살금살금 책상 밑에서 빠져나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교무실 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이제 나가자.”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교무실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 서자 겨우 안도의 숨이 나왔다. 나는 등을 펴고 털썩 벽에 기대었다. 진우도 내 옆에 기대어 섰다. 한참 동안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아직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진우가 가장 먼저 침묵을 깼다.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 아까 책상 밑에서 그가 내뱉었던 말을 다시 내게 확인시킨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내가 뭐라 그랬어? 이럴 줄 알았다고 했지. 괜히 염탐하다가 큰일 날 뻔했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우 말이 맞아. 우린 정말 아슬아슬했어.’ 방금 전까지의 공포가 되살아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나 역시 처음엔 그저 장난스레 선생님 노트북을 엿보자고 한 거였을 뿐인데, 사태는 예상 밖으로 심각하게 흘러가 버렸다.

한동안 우리는 복도에 기대어 선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교무실 안 노트북 화면에 나타났던 그 이메일… 나는 그 장면을 곱씹었다. 도무지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이 강민규, 그 반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애의 부모님께 수학 중간고사 시험지를 보내고 있었다. ‘선생님이 시험지를 유출했다…? 왜? 대체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민규는 평소 성적이 상위권이긴 했지만 전교 1등 수준은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은 항상 공정과 원칙을 강조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이 한 학생에게 시험 문제를 빼돌려 주다니. 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동시에 이해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스스로 그렇게 위험한 부정을 저지를 이유가 뭘까? 민규 부모가 무슨 압력을 넣었나? 아니면 돈이라도 주었나? 설마...

옆에서 진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걸 봐버렸냐…” 그도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진우는 이내 입술을 굳게 다물며 주변을 살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진우가 내 팔을 가볍게 끌었다.

우리는 복도를 지나 운동장 모퉁이의 나무 그늘 아래까지 걸어갔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따가운 늦봄의 햇살이 교실 창문들을 반짝이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늘진 담장 밑에 주저앉았다. 진우도 내 앞에 쭈그리고 앉으며 주위를 한번 더 둘러보았다. 다행히 우리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민성아, 우리… 아까 그 일, 그냥 못 본 걸로 하자.” 진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는 아직도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못 본 걸로 하자고?” 내 목소리가 떨렸다. “진우야, 담임 선생님이 시험지를 유출한 거라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진우가 놀란 듯 손짓으로 내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쉿! 목소리 낮춰.” 그는 주위에 누가 듣는 사람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도 알아. 큰일인 거 알아. 근데 우리가 뭘 어쩔 건데? 괜히 나섰다간 우리만 다칠 수도 있어.”

진우의 눈빛은 두려움에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진우를 답답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럼 가만 있으란 말이야? 선생님이 그런 부정을 저지르는데도 모른 척하자고?”

“달리 어떻게 해? 우리가 이 사실을 알린들, 증거라도 있어? 그냥 우리가 봤다고 말하면 선생님이 인정할 것 같아? 아니면 학교에서 순순히 믿어줄까? 오히려 우리를 무고죄로 몰 수도 있어.” 진우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가 남의 노트북을 들여다본 게 잘한 일이 아니야. 괜히 우리만 처벌받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맞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한 일도 잘못이었다. 비록 의도는 가벼운 호기심이었지만, 담임 선생님의 개인 이메일을 훔쳐본 셈이니. “하지만…” 나는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덮어버리면, 민규 혼자 부정한 이득을 보는 거잖아. 우린 다 시험공부 열심히 해서 치르는데… 불공평해.”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 거야.” 진우가 힘없이 웃었다. “네가 너무 순진해서 그래, 민성아. 세상엔 이런 일 비일비재해. 네가 정의롭게 굴어서 뭘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괜히 나섰다가 우리만 피 보는 거지.”

나는 그의 말을 듣고도 선뜻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진우의 말대로 확실한 증거도 없는 우리가 나서서 얻을 수 있는 게 뭔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결국 내가 조용히 입을 다물자, 진우는 안심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잘 생각한 결정이야. 잊어버리자, 응? 못 본 척 넘어가.” 진우가 다독이듯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담임 선생님의 비리를 알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서로 단단히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도 며칠 내내 나는 마음속에 돌덩이를 안고 지내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두 개의 목소리가 싸웠다. ‘그냥 있어. 나섰다가 큰일 나.’ 하는 진우의 목소리와 ‘이대로 침묵하면 우리도 공범이야.’ 하는 또 다른 목소리. 후자의 목소리는 분명 내 양심이 보내는 신호일 터였다.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 선생님 노트북 화면에 떠 있던 그 이메일 화면이 또렷이 떠올랐다. ‘민규는 이미 시험 문제를 다 알고 시험을 치르겠지. 난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고….’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항상 아침조회를 할 때마다 우리에게 정직하고 성실하라고 가르치곤 했다. 그런데 그 이면에서 이런 부정을 저지르다니. 그 불의에 눈감는 내가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현실적인 두려움이 다시 날 짓눌렀다. 아침에 등교해서 담임 선생님 얼굴을 마주치면 숨이 막혔다. 혹시 선생님이 우리가 본 것을 눈치챘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우리를 대했다. 오히려 나만 혼자 불안에 떨며 눈길을 제대로 못 마주쳤다.

진우는 겉으론 태연해 보였다. 쉬는 시간에 모르는 문제 좀 가르쳐 달라며 내 옆자리에 슬쩍 와 앉기도 했다. 평소와 똑같이 장난도 치고 농담도 했다. 마치 며칠 전 그 사건은 전부 내 악몽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진우가 가끔 던지는 한마디에서, 그 역시 이 일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너 아직도 그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어느 날 점심시간에 진우가 슬쩍 물었다.

“무슨 생각.” 내가 짐짓 모르는 척 되묻자, 진우는 젓가락으로 도시락 반찬을 휘저으며 낮게 말했다. “담임 일 말야. 신경 끄라고 했잖아.”

나는 입안의 밥을 삼키며 대답했다. “신경 안 써. 나도 바보 아니거든.” 그러나 내 목소리는 무척 기운 없어 들렸다.

진우는 미심쩍다는 듯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잘 생각해. 우린 학생일 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괜히 정의의 사도 흉내 냈다가 다칠 수도 있다고. 현실 감각 좀 가져, 민성아.”

현실 감각. 진우는 늘 나한테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으면서도 부인하기 어려웠다. 맞다, 난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늘 진우에게 의지해 왔다. 진우는 무슨 일이든 큰 소동 없이 해결하는 법을 알았고, 덕분에 우리 둘은 탈 없이 학교생활을 해왔으니까. 예전에 어떤 날은 반에서 싸움이 났을 때도, 나는 흥분해서 끼어들려 했지만 진우는 “괜히 휘말리지 마” 하며 나를 말렸다. 그땐 진우 말대로 가만 있었고, 싸움은 이내 교사가 수습했다. 진우는 내게 “거봐,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했지?” 하고 웃으며 넘어갔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조용히 피해 가는 쪽을 택했고, 나는 그런 진우를 속으로는 듬직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내 안의 양심이 쉽게 잠잠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담임 선생님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커져 갔다. 중간고사 하루 전날 밤, 나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내일 시험인데, 민규는 이미 답을 다 알고 치겠지. 선생님과 그 집은 부정한 비밀을 공유한 공범이고… 나와 진우는 그걸 알면서도 침묵하는 또 다른 공범이나 마찬가지야.’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참을 수 없이 자괴감이 들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정말 가만있어도 되는 걸까?’


결국 나는 결심을 못 내린 채 중간고사 당일을 맞았다. 수학 시험지의 첫 장을 받았을 때, 나는 무심코 교탁에 서 있는 담임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작하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문제가 이미 누군가에겐 며칠 전에 유출되었다….’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손이 떨려서 연필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시험 시간 내내 나는 집중하지 못했다. 몇 문제를 풀긴 했지만 연필 끝은 계속 흔들렸다. 무엇보다 교실 맨 앞줄에 앉은 민규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는 문제를 술술 풀어나가는 듯 보였다. 중간에 고개를 들더니 창밖을 내다보거나 다 푼 사람처럼 여유롭게 교실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의 여유로운 뒷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확실해. 민규는 이미 답을 다 외웠겠지. 그러니 저렇게 여유롭지….’

내 자리에서 눈질로 보니, 민규는 시험 종료 종이 울리기 훨씬 전에 답안지를 뒤집어놓고 팔을 베고 엎드려 있었다. 반면 나는 몇몇 문제를 아예 손도 못 댄 채 시간을 다 보냈다. 시험 종료 벨이 울렸다. “답안지 걷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에 모두가 펜을 내려놓았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손끝을 바라보며 묵묵히 답안지를 앞자리로 넘겼다.

시험이 끝나자 복도에서는 학생들의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수학 완전 어려웠어, 망했다.” “20번 대체 답이 뭐야?” 곳곳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민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혼자 조용히 교실 뒤편 창가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흘깃 보았다. 민규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속으로 ‘난 다 맞았는데 뭐’ 하고 말하는 듯한 오만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가슴 속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민성아, 진정해.” 옆에서 진우가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민규를 노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우는 내 앞을 슬쩍 가로막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제 다 끝났잖아. 시험도 끝났고… 그냥 넘어가.”

나는 진우를 뿌리쳤다. “끝난 게 아니야.” 목소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거칠게 나왔다.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어.”

진우가 깜짝 놀라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야, 왜 이러는데…?”

“불공평한 게 너무 많아. 나… 더는 못 참겠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선생님이랑 민규는 아무 일 없던 듯이 넘어가겠지. 다음에도 또 그럴 거야, 안 그래?”

“쉿, 그러니까…!” 진우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얘기하느라 바빴고, 우리 대화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진우는 내 팔을 거세게 붙잡았다. “민성아, 아직 정신 못 차렸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선생님한테 달려가서 따질 거야? 아니면 교장실에 쳐들어가서 고발이라도 할래?” 그의 목소리에도 분노가 배어 있었다. “증거도 없잖아, 증거도! 괜히 설치다가 우리만 의심받고 벌 받을 수도 있다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진우의 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증거… 증거라…” 나는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휴대폰! 맞다, 그날 교무실에서 내가 황급히 찍었던 노트북 화면 사진. 너무 다급한 나머지 화면이 제대로 찍혔을지는 모르지만, 혹시 거기에 메일 내용이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진우가 “뭐해?” 하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무시했다. 그날 찍었던 사진을 찾아 떨리는 손가락으로 열었다. 흐릿한 사진 속에 이메일 제목과 수신인의 이름 일부가 보였다. ‘…중간고사 수학시험지… 강민…’ 부분적으로 찍힌 글자들이었지만, 나와 진우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기에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있다… 증거가 여기 있잖아!’ 완벽하진 않아도 최소한 문제를 제기할 단서는 될 수 있었다. 나는 진우에게 폰 화면을 보여주려다 이내 멈췄다. 진우는 내 옆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너 설마 그날 이걸 찍었어?” 그는 사진을 흘낏 보자마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응, 혹시 몰라서….” 내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진우는 화가 난 듯 나를 노려보았다.

“미쳤어? 그런 걸 왜 찍어! 만약 이거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빨리 지워, 당장!” 진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떨렸다.

나는 움찔했다. 진우가 이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을 보는 건 드물었다. 그러나 나는 휴대폰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지울 수 없어. 이게 유일한 증거야. 이걸 가지고 가면 학교에 말할 수 있을지도 몰라.”

“증거 같지도 않은 사진 하나로?” 진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흐릿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구만. 선생님은 이거 합성이라고 우길 수도 있어.”

“그래도…”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

“안 돼.” 진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네 휴대폰에 이런 거 남겨두면 우리 둘 다 위험해져. 선생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 줄 알아? 당장 지워버려.”

진우는 불쑥 손을 뻗어 내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뭐 하는 거야!”

“이리 내.” 진우가 낮게 윽박지르며 다시 손을 뻗었다. 그의 눈빛은 절박했다. “내가 지워버릴게. 너 나중에 후회 말고 지금 날 믿어. 이게 다 너 위해서야.”

“날 위해서?” 나는 쓰게 웃었다. “진우야… 넌 지금 그걸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 위해서 이 일을 덮자는 거야, 아니면 너 자신을 위해서야?”

“뭐?” 진우의 손이 멈췄다. 그의 얼굴에 처음 보는 당혹감이 스쳤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쌓였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넌 늘 그래 왔어. 그냥 모른 척, 조용히 넘어가자고. 위험 부담 질 생각도 안 하고. 그걸 신중함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목이 메어 왔지만 계속 말했다. “그런데 결국엔 아무 것도 안 하고 피하는 게 다였어. 난 이제 알아. 네가 말하는 현실적이라는 게 뭔지.”

“야, 이게 다 너 생각해서—” 진우가 항변하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아니. 널 위해서겠지.” 내 목소리가 차갑게 갈라졌다. “넌 다칠 일 만들기 싫은 거야. 선생님 비리가 드러나든 말든, 누가 부정한 이득을 보든 말든, 그냥 네 코만 무서운 거잖아.”

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민성아… 넌 지금 너무 흥분해서 이성적 판단을 못 하고 있어. 그래, 나 겁나는 거 맞아. 인정해. 난 문제 일으키기 싫어. 그게 나쁘냐?”

“때로는 나빠.” 내가 단호히 말했다. “특히 지금 같은 때엔… 그건 비겁한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우의 눈에 분노가 번쩍였다. “비겁? 날 비겁하다고?” 그는 씽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좋다. 비겁해서 내가 살 수 있다면 난 평생 비겁하게 살겠다. 너처럼 만용 부리다 망신당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지.”

나는 뜨거운 눈물이 눈앞을 가리는 것을 느꼈다. 친구와 이렇게까지 심하게 부딪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차분해지는 내 자신도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편해지는 듯했다. 아,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구나. 진우와 결별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오히려 담담한 용기가 솟았다.


“알겠어.” 내가 힘주어 말했다. “넌 네 길로 가. 난 내가 옳다고 믿는 걸 할 거야.”

진우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네가 뭘 어떻게 할 건데. 교장한테 이 사진 가져가서 우리 담임 비리 신고할 거야? 네 말 믿어줄까? 선생님이 오히려 너 명예훼손으로 문제 삼으면 감당할 수 있겠냐?”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말리려는 듯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 민성아.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 네가 이 일 파고들면 결과 뻔하다고. 결국 우린 아무 것도 못 바꾸고, 너만 다칠 거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그의 목소리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떨렸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우야. 그 말… 이젠 안 통할 것 같아.”


진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우리 사이에 길었던 침묵이 흘렀다. 교실 밖 복도에는 종례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빛이 교실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에 휴대폰을 꼭 쥐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진우에게서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이제 널 믿지 않아.”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넌… 넌 내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랑 나, 길이 달라.”

진우의 얼굴에 스치는 여러 감정들이 보였다. 놀람, 분노, 그리고 어딘가 안쓰러운 기색까지. 하지만 그는 곧 굳은 표정을 지었다. “좋을 대로 해. 네 인생이니까.” 그의 말투는 애써 담담한 듯했지만 그 속엔 서늘한 회의가 묻어나왔다. “나중에 꼭 후회하게 될 걸. 그때 내가 뭐라고 그랬는지 떠올리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 하고.” 마지막 문장은 거의 읊조리듯 작게 말했지만, 나는 똑똑히 들었다. 진우의 입에서 또다시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우를 향해 잠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교실을 벗어나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진우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멀어졌다는 것을.

복도를 걸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두려웠다. 가슴 한쪽엔 여전히 불안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다른 한쪽엔 묘한 해방감이 피어올랐다. 진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매사에 진우의 판단에 기대 왔다. 내게 없는 현실감각을 그에게서 빌려 쓴 대가로, 나는 그의 ‘신중함’에 내 의지를 억눌러야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처음으로 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려 하고 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모르는 건 아니다. 어쩌면 진우 말대로 나는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거짓말쟁이나 문제아로 낙인찍힐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만 한다고 내 속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나는 내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교장실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한순간 망설였다. 문 너머로 교장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식은땀이 손바닥에 배었다. 하지만 나는 곧 이를 꽉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려워하지 말자. 피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회피와 침묵, 그게 진짜 악일지도 몰라. 잘못을 보고도 모른 척 외면하는 비겁함… 진우는 그걸 신중함으로 착각했지만, 이제 난 속지 않아.’

나는 마음속으로 담담히 되뇌었다. ‘악은 특별한 누군가의 모습으로만 오는 게 아니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우리 안의 나약함, 그 회피와 피동성이야말로 악일 수 있어.’ 지금 내 안에 일어난 각성은 그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악에 져주지 않기로 했다.

문득 눈앞이 뚜렷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히 보이는 듯했다. 비록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부르든, 그 책임은 이제 오롯이 내 몫이다. 진우도 없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래, 이것이 성장이라는 거라면… 나는 앞으로 나아가겠어.’ 속으로 다짐하며 나는 조용히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노을이 길게 드리운 복도 끝, 닫힌 교장실 문 앞에 선 내 모습이 창문에 희미하게 비쳤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그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내 등 뒤로는 붉은 석양빛 사이로 교실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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